고암 이응노의 삶과 예술, 이응노의 문자추상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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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 이응노의 삶과 예술, 이응노의 문자추상의 탄생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4.08.15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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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수덕사 암각화(탁본), 한지에 탁본, 370x101cm, 1969년.
<strong>황찬연<br></strong>DTC아트센터 예술감독<br>칼럼·독자위원
황찬연
DTC아트센터 예술감독
칼럼·독자위원

고암 이응노 화백이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던 1960년대의 파리의 풍경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1940년대 이후 전쟁의 상흔을 입은 시민들의 정신적 신체적 상흔과 더불어 도시의 여러 곳에서는 전쟁의 피해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유럽의 세계대전 이후의 미술은 전쟁의 상흔에 따른 암울한 분위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미술경향과 새로운 시대를 건설하고 밝은 미래를 희망하는 미술경향 등이 나타나게 된다. 당시의 프랑스 파리는 새로운 도시 재건에 따른 새로운 건물과 폭격을 맞은 낡은 건물들이 공존하면서 빚어내는 멜랑콜리한 정서가 지배적이었다. 

1960년대 이응노 화백은 새로운 경향의 작품세계를 추구하고 있었는데, 형상은 사라지고 퇴색한 색감만으로 이뤄진 꼴라주 작품과 수묵의 번짐만으로 이뤄진 추상작품을 제작했다. 당시의 작품이 너무 어둡고 칙칙한 색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인지 아들 이융세가 허물어지고 낡고 칙칙한 건물의 벽을 가리키며 ‘저기 아버지 그림이 있다’고 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응노, 추상, 한지에 수묵담채, 132x67.5cm, 1960년대.

작품 <추상>은 1960년대 이응노 화백의 실험적 작품인데, 수묵을 한지 위에 여러 번 반복적으로 먹이면서 깊은 색감을 바탕으로 하고, 그 위에 붓질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고 오로지 수묵의 자유로운 번짐을 통해 추상적 형식을 추구하고 있다. 이외에도 수묵담채로 화면을 처리한 후 변형된 문자추상을 꼴라주하기도 했다.

1960년대는 이러한 양식의 변화를 추구하면서 전통의 계승과 동양의 한자와 서체에 관심을 기울이던 이응노 화백은 갑골문이나 고대 상형문자 등을 변형시킨 문자추상을 구상하기에 이른다. 당시 파리에 있던 한국 화가들 가운데 권옥연, 남관 등도 갑골문이나 루브르미술관에 전시돼 있던 이집트 조각이나 이슬람 유적에 새겨진 고대 상형문자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의 변화를 시도했던 정황을 연결지어 생각해 보면,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했던 아시아 문화권의 여러 예술가들에게 문자추상의 예술형식 탐구는 공통적 현상이었다. 

문자추상 양식을 탐구하고 있었던 이응노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동백림사건과 연루돼 한국 교도소에 수감(1967~1969)되며, 모든 예술활동을 중단되는 듯했다. 그러나 천성이 부지런하고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였던 이응노는 옥중에서도 파리에서 탐구했던 예술형식을 지속적으로 이끌어갔다. 특히 다양한 재료(낡은 부채와 달걀 껍질, 나무 도시락, 간장과 고추장, 신문지 등)를 가지고 다양한 문자추상 형식을 탐구했다. 

수덕여관 앞 너럭바위에 새겨진 문자추상 작품은 이응노가 1969년 1월 형집행 정지로 출소된 후 약 3개월간 수덕여관에서 요양을 하며 제작한 것으로 잘 알려진 작품이다. 작품의 내용을 보면 한자와 그림이 결합한 동양의 문자도 양식을 기반으로 현대적인 문자추상의 초기 형식을 옥중에서 일정 단계까지 끌어 올렸음을 알 수 있다.

황찬연 <DTC아트센터 예술감독, 칼럼·독자위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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