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히 걷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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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히 걷는 사람
  • 조희주 <꿈이자라는뜰 사회적협동조합>
  • 승인 2025.02.20 11:00
  • 호수 878호 (2025년 02월 20일)
  • 1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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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바지 입은 걸 후회했다. 온 몸에서 땀이 났다. 무릎과 허벅지, 엉덩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흐늘거리던 가벼운 바지가 땀에 푹 젖어, 걸을 때마다 접히는 부위에 들러 붙었다. 8월 휴가 중이었고, 전국에 폭염주의보가 내린 뜨거운 여름날의 한 가운데였다. 나는 화엄사에 가고 있었다.

8월 한 낮에 화엄사까지 걸어 올라가기를 선택한 이는 나뿐인 것 같았다. 작열하는 태양이 달군 길 위에서 만난 건 때 이르게 알에서 나와 벌거벗은 채 죽은 어린 새, 느린 걸음으로 나무를 오르던 매미, 기세 좋게 흐르는 시끄러운 계곡물, 지리산 자락의 울창한 나무 떼, 그리고 이끼였다. 물가 근처의 둥치가 굵은 나무들은 이끼가 만든 옷을 빼입고 있었다. 땀으로 끈적해진 손을 뻗어 이끼를 쓰다듬고, 울타리 너머에 있는 이끼는 눈으로 훑었다.

나무를 휘감고 있는 이끼는 단일종의 응집처럼 보이기 쉽다. 그렇지만 이끼 군락은 우림, 숲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보이는 것뿐 아니라, 구조와 기능 모두 같다. ‘이끼 숲’에서도 “초식동물, 육식동물, 포식자가 복잡한 먹이사슬을 이룬다. … 에너지 흐름, 영양소 순환, 경쟁, 공생과 같은 생태계 규칙이 적용된다.”(95쪽) 키머러는 작지만 웅장한 ‘이끼 숲’을 한 권의 책을 통해 면밀히 들여다본다. 한 손에는 과학자의 시선을 상징하는 확대경, 한 손에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영혼을 상징하는 메디신 백(아메리카 원주민이 목과 허리에 차는 작은 주머니)을 들고.

《이끼와 함께》 로빈 월 키머러 저/ 눌와/ 2020년 2월 /13,800원

이끼의 세계는 한 나무가 살아온 긴 세월을, 숲의 시작을 볼 수 있게 한다. 이끼와 나무는 공생 관계다. 이끼는 이제 막 싹이 튼 나무 주변에서 습기를 머금은 채 자리를 지키며 어린 나무가 깊이 뿌리내리도록 돕는다. 그리고 성장한 나무의 그늘 밑에서 이끼 또한 번성한다. 나를 자꾸만 멈춰 세운 계곡가의 나무와 그 둘레에 낮게 깔린 이끼 매트가 만든 풍경은, 서로의 전 생애를 걸쳐 관계 맺어온 지속성의 결과일 것이다. 아직 화엄사까지 가는 길은 절반 이상이나 남았지만, 화엄사의 천년 역사만큼이나 긴 세월을 품은 존재를 눈앞에 두고 감탄하고 있었으니 애초에 목적한 바를 상당히 이룬 셈이었다.

그렇게 나는 천년 역사를 품은 절과 지리산 자락 거센 기운을 앞에 두고도 이끼를 봤다. 여행까지 가서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이끼에 감탄하며 사진 찍기에 몰두할 만큼 매료의 순간은 강렬했다. 1g의 이끼 덩어리는 하나의 소우주다. “…숲 바닥에서 채취한 이끼 덩어리 1g은 크기가 대략 머핀 한 개 정도에 불과하지만 일반적으로 원생생물 15만 마리, 완보동물 13만 2000마리, 톡토기 3000마리, 담륜충 800마리, 선충 500마리, 진드기 400마리, 파리 유충 200마리가 서식한다.”(98쪽) 나무가 곱게 차려입은 이끼 드레스를 바라보며 이런 수치를 떠올렸다. 상상 속에서 점처럼 그려지는 무수한 생명의 모습에 조용히 소름 돋아 했다.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방대한 생태계를 처음 인지한 작은 인간의 재채기 같은 생리적 반응이었다.

“생명이 가득하고, 생물학적으로 풍요로우며, 생생하고 정교한 그곳은 경외말고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잎마다 미스터리들이 있다. 지구상에서 다른 어떤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생명체들이 존재하며, 억겁의 세월 동안 정교한 상호관계가 진화했다. 당신은 이제 그 소우주들을 밟지 않도록 조심히 걷게 될 것이다.”(107쪽)

발치마다 소우주가 있다는 것을 안 사람은 조심히 걷는 법을 새롭게 배우게 된다. 키머러는 책을 통해 ‘이끼와 함께 조심히 걷는 사람’의 모습을 차근차근 그려 낸다. 조심히 걷는 사람은 보이는 것 너머에 엄청난 수의 생명이 머무는 보금자리가 있음을 안다. 돈의 논리가 생태계를 장악하는 현장을 눈을 감지 않고 마주한다. 서로가 서로를 돌보며 번성하는 생태계 속 상호성를 통해 사랑으로 관계 맺는 법을 익힌다.

푸르고 뜨거웠던 여름 휴가는 일찍이 끝났다. 세상은 쉽고 빠르게 버려지고 파괴되며, 거짓과 혐오가 넘치는 한겨울을 나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키머러의 이끼 이야기를 더욱 소중하게 펼쳐 들게 된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조심히 한 걸음 내딛는 연습을 한다. 발걸음에 새로운 씨앗을 심고자 하는 염원을 담는다. 축축한 이끼매트의 보살핌을 받고 자라 무성해질 나무 한 그루를 상상하며, 지금 당장 세상을 뒤바꿀 수 없을지라도 이끼와 함께 오늘의 느린 한 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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