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천노인대학장, 칼럼·독자위원
일 년 중 가장 달이 밝다는 정월대보름을 지낸 지난 15일 홍동중학교 해마루 강당에서 ‘풀무신용협동조합 제53차 정기총회’가 개최됐다.
1969년 11월 10일 창립한 풀무신협은 주정모 이사장을 비롯해 강현주 전무와 임원 9명 직원 9명이 ‘소통과 신뢰로 함께 도약하여 비상하는 풀무신협’이란 경영슬로건으로 600여 명의 조합원이 함께 새 출발하는 날이었다. 현재 조합원 3327명과 자산 774억 원으로 농촌지역에서 서민적인 신용조합으로서는 전국에서도 각광을 받는 신협이 됐다.
전체 조합원은 홍동면 인구와 비슷하며 홍성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비율로 홍동면 내 여러 기관 중에도 한몫을 하는 명실공히 자타가 공인하는 조합이기도 하다. 그런데 홍동면 내에 있는 여러 기관이나 홍동농업협동조합처럼 홍동이 아닌 풀무라는 이름에 의아해 하는 분도 있을 것 같아 이해를 돕기 위해 소개하고자 한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66년 전인 1958년 4월 23일은 풀무학교가 개교한 날이다. 지난 2022년 개교 100주년을 맞이한 홍동초등학교에 험난한 보릿고개를 넘던 1950년대 어느 해 졸업식장에 참석했던 주옥로 선생님께서 졸업생 중에 소수 학생만 중학교에 진학한다는 유인물을 보고 가슴에 큰 울림을 받으셨다. 한참 배워야 할 청소년기의 학동들이 가난이라는 굴레 때문에 진학을 포기하고 서당이나 지게 지고 논과 밭에 몇 명은 공장으로 나머지는 갈 곳이 없어 방황하게 된다니! 그 시절에 농촌에서 복음을 전도하던 주옥로 전도사님은 서울에서 모이는 무교회 동기 집회(일반교회 부흥회)에 참석해 이런 딱한 사정을 호소하듯 전했다.
이에 마침 평안북도 정주에서 월남하신 기미 3·1 독립운동의 33인 중에 한 분이신 남강 이승훈 님의 후손인 이찬갑 선생을 만나게 됐다. 이찬갑 선생님은 일반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언젠가는 농촌에 이상적인 교육을 꿈꾸던 차에 주옥로 선생님을 만나 두 분의 기독교 신앙과 민족애의 사상이란 큰 바탕 위에 풀무학교가 개교됐다.
우선 ‘풀무’라는 이름은 옛날 팔괘리에 개교한 풀무학교 자리가 풀무골이라 했고 풀무는 대장간에서 녹슨 쇠를 용광로에 달궈 새로운 연장을 만들 듯이 새로운 인간을 양성하자는 뜻이 있다. 또한 성경에 풀무불은 고난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정신으로 새 시대의 새 역사의 역군이 되고자 함이 풀무학교의 건학이념으로 여러 가지 함축된 뜻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어떤 분은 풀무원이 같은 재단으로 알고 있는데 풀무원 원경선 이사장님이 전에 풀무학교 이사로 계실 때 풀무라는 이름이 좋아서 사용하게 된 연유뿐이다.
그 당시 일반 대학에서 쓰는 논문을 풀무학교는 고등부를 창업(졸업)하면서 쓰게 되는데 정규채 학생은 ‘지역 사정에 입각한 신용조합과 구판조합’이란 제목으로 썼다. ‘꿈은 꾸는 자의 것이고 꿈은 이뤄진다’는 말처럼 1969년 11월 10일 풀무학교 교실 한편에서 교사와 수업생 18명이 출자금 4500원으로 초대 이사장에 주옥로 선생님을 전무로 정규채 직원을 선임하게 된 것이 풀무신용협동조합의 첫 출발점이었다.
어느새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 풀무신협은 개교 정신을 바탕으로 빈곤을 해결하는데 일익을 담당하는 금융사업을 비롯해 사료사업, 종돈장 설치, 양돈대학, 유기농 지원, 벚꽃 길 조성사업, 미생물 공장 신축, 풀무신협 산악회 발족, 풀무신협 소식지 발간, 홍성지역 역사기행실시, 마을 조합원교육, 내포 홍예지점 이전, 우리 동네 어부바 사업, 꾸러미 배달부 등으로 조합원과 지역민들의 욕구에 보답하며 급성장해 홍동지역에 없어서는 안 되는 요긴한 기관으로 자리 매김하게 됐다.
정규채 전무 한 사람의 소박하지만 야무진 꿈이 티끌 모아 태산이 되듯 거대한 조합으로 성장하는 초석이 됐으며 그 꿈의 성취를 만족하기도 전인 2016년 5월 정규채 전무는 우리 곁을 떠나게 되는 슬픔을 당하게 됐다.
이제 남아 있는 우리는 그간에 수고한 몇 분의 이사장님을 비롯해 임직원과 전체 조합원들이 신용과 협동을 중요시하는 풀무신용협동조합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 폐회에 앞서 신협의 노래를 우렁차게 부를 그날을 생각하며 답례품과 행운권 추첨에서 받은 선물을 한 아름 안고 내년 총회에 만나기로 기약하며 아쉬운 발길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