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한 세상의 정치
상태바
망한 세상의 정치
  • 장정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5.05.29 07:50
  • 호수 892호 (2025년 05월 29일)
  • 11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strong>장정우</strong> <br>공익법률센터 농본 활동가<br>칼럼·독자위원<br>
장정우
공익법률센터 농본 활동가
칼럼·독자위원

조기 대선을 앞두고 우리는 다시 한번 정치의 한복판에 섰다. 하지만 탄핵 이후의 대선임에도, 모든 후보가 ‘국민’을 위한다고 외치고, 탄핵에 앞장선 민주당이 압도적 승리를 호소하는데도 나(우리)는 왜 선거로부터, 정치로부터 점점 소외된다고 느끼는 것일까. 

2018년부터 《전국투표전도 20××》 시리즈를 써온 조현익은 2018년, 2020년, 2021년, 3번의 선거를 맞이하며 3권의 시리즈물을 제작했다. 그러나 첫 시작으로부터 6년, 15년 차 정치덕후는 2024년 선거를 앞두고 이렇게 고백한다. 

“2018년 지방선거 이후의 한국 정치는 가이드북을 제대로 만들 수 없는 환경으로 변해갔습니다. 과거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미래 정치 환경을 예측할 수도 없었고, 선거 때의 이슈와 공약을 정리하는 것은 소용없을 정도로 한국 사회가 빠르게 ‘망한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8쪽) “2024년 지금 돌아보면 그 시도가 모두 허망합니다. 정치판이 황량해져서 유권자도 정치인도 모두 길을 잃고 떠돌거나 정치를 떠났습니다. 이제 가장 간단한 질문인 ‘어떤 정당을 지지하는가? 어떤 정당에 속해서 정치하고 싶은가?’에 대해서 누구도 자신 있게 답할 수 없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요?”(13쪽) 선거가 정말 민주주의의 꽃이라면 2년마다 피는 꽃 앞에서 왜 시민들은 점점 시들어가는가. 

저자는 2024년 총선을 앞두고 출간한 책, 《세상은 망했는데 눈 떠보니 투표일?!》을 통해 그 원인으로 철학이 사라진 선거를 지목한다. 코로나 이후 불평등이 더욱 고착됐지만 양당의 대선 공약에서 불평등에 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으며, 해마다 심각해지는 기후변화로 인해 산불이 대형화되고, 농민은 예측 불가능한 날씨에 힘들어하며, 이상기후로 인해 피해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음에도 기후변화 공약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심지어 2025년 대선에서 중도 보수를 표방한 민주당의 공약은 내란 청산을 제외하면, 내란을 일으킨 국민의힘과 매우 유사하다. 어떤 ‘성장’인지에 대한 내용(철학) 없이 성장 담론을 내세울 뿐이다. 
 

《세상은 망했는데 눈 떠보니 투표일?!》 조현익 글·키박 그림/ 스튜디오하프-보틀/ 2024년 3월/ 20,000원
《세상은 망했는데 눈 떠보니 투표일?!》 조현익 글·키박 그림/ 스튜디오하프-보틀/ 2024년 3월/ 20,000원

철학의 부재는 단순 공약의 내용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이재명 민주당 대통령선거 후보는 지난 18일 열린 대선 토론회에서 차별금지법에 대해 “방향은 맞다고 보지만 현안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이걸로 새롭게 논쟁·갈등이 심화되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하기 어렵다”며 사회적 합의의 어려움을 앞세워 난감해했다. 얼핏 보면 차별금지법을 두고 나뉜 찬반 양측 모두를 존중하는 것 같지만, 이는 무시에 가깝다. 사회적 논의가 부족하다면 그 논의를 만드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합의가 어렵다는 이유로 멈춰 서는 것은 정치가로서 스스로 정치의 역할(영역)을 축소해 버리는 행위일 뿐이다. 

같은 이유로 현재 후보들이 말끝마다 ‘국민’을 앞세우는 것 역시 문제이다. 얼핏 보면 민의를 받드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이는 저자의 말대로 ‘대세를 받드는 정치’일 뿐이다. 이들이 말하는 ‘국민’, 즉 ‘대세’는 업체들이 매주 발표하는 여론조사 속 숫자일 뿐이다. 여론조사로 좌우되는 정치에서, 정당과 정치인들은 설득과 토론보다는 즉각적인 지지율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네거티브 전략에 의존하게 된다.

이처럼 대선을 앞둔 오늘날의 정치는 여론이라는 말로 개별 시민의 특수성을 납작하게 뭉뚱그려버리고, 철학의 부재 속에 통일감 없는 ‘민생정책’들만 난무하는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와 같은 시민들은 누구도 자신을 대의해 주지 않으며, 선거의 결과와 내 삶은 무관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에 빠져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망한 세상에서 투표일을 맞이하는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저자는 정치를 마주하는 새로운 기준을 세우자고 말한다. 개별 정책에 집중하기보다는 각 후보가 정책으로 그리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그리고 그들이 그리는 세상이 좋은 세상인지 따져봐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즉 공약의 세부 사항보다는 정당과 후보의 가치관을 보자는 것이다. ‘국민’ 타령하며 ‘민의를 받드는’ 정치는 민의가 충돌하는 문제 앞에 무력하다. 망해가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압도적 승리를 운운하며 국민이란 이름으로 구체성을 뭉개고, 토론을 미루는 정치가 아니라 더 좋은 세상이 무엇인지, 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설득하고 토론하는 정치이다. 망한 세상 속 다가온 선거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