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풀무학교 생태농업전공부
칼럼·독자위원
여기는 나름대로 평온한 와중에도, 어디선가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2023년 10월부터 다시 시작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 이야기다. 올해 1월 19일 발효된 휴전협정이 깨어지고 다시 전쟁이다.
전쟁은, 아니 제국주의에 의한 일방적인 폭력이 이미 존재해왔다. 1917년 영국이 식민지로 삼은 팔레스타인 땅에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상관없이 유대 국가 건설을 공인한 밸푸어 선언부터, 2차 대전이 끝나고 유럽의 유대인 난민 25만 명을 팔레스타인으로 이끈 유엔의 결정부터, 이스라엘 건국 선언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된 ‘나크바(아랍어 대재앙)’부터, 1967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강제 점령과 정착촌 건설부터, 2007년 가자지구에 대한 완전 봉쇄부터, 봉쇄 이후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네 차례 대규모 공격부터, 그 폭력이 ‘먼저’ 있었다.
자기들이 나고 자란 땅에서 가만히 살고 있는 사람들을 점령하고 내쫓았다. 그리고서는 저항하는 사람들을 테러리스트로 몰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폭력의 연쇄’라고 ‘증오의 연쇄’라고 ‘둘 다 잘못’이라고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 팔레이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에 대한 대다수의 언론보도에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이 거세돼있다.

한국의 독립운동사에 비추어 생각해보자. 우리는 폭탄을 던진 윤봉길을, 김상옥을, 의열단을, 김구를, 그리고 무장투쟁으로 스러져간 사람들을 ‘의사’로서 추앙한다.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기도 하지만, 그것이 저항으로서의 폭력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가 먼저 있었고, 그 점령하에서 죽음과도 같은 삶을 조선 사람들은 겪고 있었다.
지금의 팔레스타인도 마찬가지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아직까지도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국가를 건설하지 못했고, 자치정부가 있더라도 국제사회에서 그 위상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만약 대한민국이라는 근대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미국이든 소련이든 중국이든 다시 일본이든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체제에 있었다면, 독립운동가들이 추앙받을 수 있었을까. 지금의 하마스에 대한 시선이 그렇듯 한낱 ‘피에 굶주린 테러리스트’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1967년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강제 점령한 것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다. 그 이후에 정착촌을 건설한 것도 마찬가지. 2007년 가자지구를 완전 봉쇄한 것 역시 그렇다. ‘봉쇄’는 전쟁과 같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 파괴를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서 그 폭력성을 인지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것은 그 공간 자체를 말려죽이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대해 물자와 사람의 출입을 통제하고 연료, 식량, 의약품을 최소한으로만 들여보내게 한다. 현재는 하수처리시설이 가동되지 않아 수돗물의 97%가 음용에 부적합하다. 그럼에도 마실 물이 없어 병이 되는 줄 알면서도 오염된 물을 마신다. 농어업의 경제기반이 모두 파괴되어 실업률이 46%에 달하고, 주민 80%가 국제기구의 원조에 의지하여 먹을 것을 충당한다. 전기 공급이 중단되어 의료시스템도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살아있는 죽음’ 상태에 몰아넣은 채로 그것도 모자라서 역시 국제법 위반인 백린탄을 쏘고, 시위에 참가한 청년들의 다리를 겨냥하여 산탄이 되는 총알을 쏴 절단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리고 세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대규모 공격이 있으면 화제가 되었다가 그것이 끝나면 망각한다. 각자의 일상에 파묻힌 망각의 와중에도 가자지구의 사람들은 봉쇄 상태에 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저항을 행사하면 테러리스트로 몰아간다.
이러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 오카 마리의 강연을 바탕으로 한 《가자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급하게 만들어졌다.
지금의 가자는 ‘인간성의 임계’를 보여준다. 우리가 같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진실을 외면할 수 없다,
아룬다티 로이는 9.11 테러가 있은 지 1년 후 미국에서 행한 강연 ‘9월이여, 오라’에서 이렇게 말했다. 테러의 희생자들은 추모돼야 마땅하지만, 그런 9월이 미국인 당신들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하고 많은 나라에서, 피식민자들에게서 수많은 9월이 있었다. 그러니 당신들의 9월을 제대로 추모하려면, 다른 이들의 9월까지 받아들여야 한다.
오카 마리의 말을 인용하면, 저항의 폭력이든 뭐든, 전쟁범죄는 그것으로 심판받아야 하지만 근원에 있는 폭력을 비판하지 않고 저항의 폭력만을 비난하는 것은 몰역사적이며 정의에 반하는 것이다.
식민주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가자지구와 같은 상황에 비추어보면 일상에서 겪는 고민들이나 모든 것들이 너무도 사소해보인다. 그리고 글은, 언어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무기력하다. 그럼에도, 지는 싸움밖에 안 될지라도,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지점이 있다. 그 지점을 지켜야 인간인 것에 덜 부끄러울 수 있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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