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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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비
  • 홍주일보
  • 승인 2014.11.04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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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은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늦봄, 창호지 너머 들려오는 빗소리에 늦은 아침을 맞이한 그날부터 나는 비를 사랑했다. 앞마당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포옥 덮어쓰고 비몽사몽의 늦잠을 즐기는 맛이 여간 포근한 것이 아니었다. 밤새 이불 속의 따뜻한 온기 속에서 숙면을 취하고 느닷없이 찾아온 행복한 아침을 음미하고 있을 때, 어머니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해가 중천”이라며 늦은 아침의 기상을 재촉한다.

나는 이유 없이 빗소리를 좋아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작은 우산 하나를 들고 정처 없이 동네를 어슬렁거렸다. 굵은 대나무처럼 쏟아지는 비를 우산 하나로 막아내며 동네 어귀를 몇 시간이고 하릴없이 걸어 다녀도 좋았다. 우산을 두들기는 불규칙한 빗소리는 세상의 어느 음악보다 매력적이었다. 운이 좋으면 또래의 개구쟁이 몇을 우연히 만나 함께 비를 맞으며 동네 공터에서 축구를 하거나 숨바꼭질을 했다. 속옷까지 흠뻑 젖은 몰골로 집에 돌아가도 어머니는 절대 꾸짖는 법이 없었다. 아침에 입은 깨끗한 옷을 몇 시간 만에 흙물로 버려 놓아도 “우리 막둥이, 감기 걸리니 어서 씻고 밥 먹으렴.” 그 뿐이었다.
어머니는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나를 따뜻한 물로 씻겨주고 햇볕에 바짝 마른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녹초가 되어 초저녁부터 꾸벅꾸벅 졸고 있으면 품에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거나 앞머리를 천천히 뒤로 넘겨주었다. 고난의 세월을 이겨낸 어머니의 투박한 손바닥은 신기하게도 부드럽고 따뜻했다. 어머니는 손으로도 사랑을 전해 줄 수 있는 특별한 마법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이마에서 살랑거리며 간지럽히는 앞머리를 쓸어 줄 때마다 나는 빗소리와 함께 한발 한발 깊은 수면으로 들어갔다. 어렸지만 어머니의 품에서 잠이 드는 그 순간이 너무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멈추어 주기를, 영원히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유년시절의 이러한 경험 때문인지 지금도 비가 오는 날에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해 허둥지둥 할 때가 많다. 비가 내리는 날의 대부분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다. 어떠한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그저 몇 시간 동안 물끄러미 창밖의 비를 쳐다 볼 뿐이다. 문득 정신을 차리면 오백 개쯤은 족히 달려있는 나의 역마살 때문에 어디론가 훌쩍 떠나야 하는 운명을 가진듯하다. 이런 날에는 운전석 옆에 따뜻한 커피 하나를 꼽아놓고 핑크플로이드나 기타로의 음악을 들으며 무작정 길 없는 길을 찾아 떠나야 한다. 그 길이 느티나무가 빼곡히 심어져 있는 시골의 한적한 도로이거나 파도 소리가 안개 속의 메아리처럼 은밀히 다가오는 이름 없는 바닷가의 해안이라면 더욱 좋다.
그 길을 따라 천천히 달리고 있노라면 나는 그동안 놓쳤던 속세의 수많은 풍경들과, 의미 없는 들바람 소리들과, 그들이 애초에 가지고 있었던 본래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기이한 능력을 갖게 된다. 비 온 뒤의 소나무는 자신의 향기를 더욱 짙게 드러내고, 민들레는 몇 날 며칠을 소중하게 간직한 홀씨를 주저 없이 대지에 떨어뜨린다. 무명의 잡초는 태초부터 숨겨왔던 풀내음을 수줍은 듯 드러내고, 어머니 산소 옆에 돋아난 반가운 제비꽃과 할미꽃은 다음 생을 위하여 힘찬 기지개를 한다. 이렇듯 대지는 비로 하여금 촉촉하게 젖어들고, 때를 같이하여 세상은 더욱 생기를 갖거나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

비는 나를 정화하고 치유한다. 내가 그렇게도 털어내려고 애썼던 미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던 분노, 감추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속물근성, 너무 힘들어 마음까지 구부러뜨리는 절망, 세월이 흘러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는 슬픔, 그리고 내 젊은 날을 갉아먹었던 불안감까지 그렇게도 버리고자 소망했던 모든 것을 깨끗이 씻어 내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비는 내가 타인 보다 전혀 우월하지 않다는, 오히려 한없이 낡고 상처 난 나무의자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내 본연의 모습을 일깨워 준다. 이렇듯 비로 하여금 내 마음의 무거운 멍에와 해묵은 짐이 씻겨지고나면, 나는 반복되고 권태로운 일상에서 벗어나 무엇이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다시 얻게 된다.

비 오는 날, 허름한 식당에 들어가 순대국밥 한 그릇과 소주 두어 잔으로 주책없이 밀려오는 허기를 채우고 싶다. 어머니가 만든 열무김치와 오이짠지가 그 식탁에 함께 놓여 있으면 좋겠다. 시원한 빗소리와 소박한 어머니의 반찬만으로도 나는 감사하며 한 그릇 뚝딱 비울 수 있다. 아주 먹음직스럽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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