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한우 명장으로 우뚝 서다
상태바
홍성한우 명장으로 우뚝 서다
  • 조 원 기자
  • 승인 2014.12.26 15: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진주농장 홍영표 씨


소 돌보던 학생에서 한우 명장으로 성장

홍성군 가축량은 인접 도인 충북도의 전체 가축량을 웃돈다. 유기농의 메카인 홍성군이 축산의 메카로도 불리는 이유다. 군을 대표하는 가축은 누가 뭐래도 한우. 홍성한우는 얼마 전 경기도 부천축산물공판장 경매행사에서 소비자들로부터 높은 호응을 얻으며 횡성한우 못지않은 인기를 실감한 바 있다. 

홍성한우의 입지를 이렇게까지 다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다름 아닌 축산 농가들의 노력일테다. 올해로 11번째 열린 홍성한우 고급육품평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홍영표 씨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동안 품평회에서 상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저보다 뛰어난 분들이 지역에 많이 계시거든요. 그분들을 모델삼아 열심히 매진한 것 밖에 없는데 이렇게 큰 상을 받게 돼서 고맙고 죄송한 마음도 드네요” 광천읍 상정리에서 30년째 한우를 기른 그였지만 대상의 소감은 매우 겸손했다. 진주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사실 천상 농사꾼이었다.

현재는 축사 2동(1만 1550㎡)에서 한우 120두를 사육하고 있지만 농사꾼의 기질을 버리지 못해 과수원도 운영하고 있다. 그가 올해 홍성한우를 빛낸 인물로 당당히 설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부모에게 물려받은 우직한 부지런함 때문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농사를 해온 그는 해 뜨면 밭에 나가 해질 때까지 일하는 습관을 부모로부터 배웠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일찍이 농사에 뛰어들면서 사과와 배를 통해 인생을 배우며 자랐다.  그가 사춘기 시절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은 나무의 수세를 관찰하는 일이었다.

비료 배분과 전지·전정은 모두 그의 몫이었다. 토양의 상태를 비교하고 거름의 비율을 재었다. 눈감고 과수 재배할 실력을 갖추기 위해 연습하고 배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자신이 얻은 지식을 실험하기 위해 종종 1년을 기다리며 나무를 관찰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과수 농사를 지으며 훗날 사과 농장을 운영하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간직했다. 그러나 군 제대 후 생계라는 벽 앞에 마주했다.  “제대하고 나니 부모님은 생계를 위해 소를 돌보기 시작했어요. 송아지 한 마리면 대학 등록금이 해결됐고 소 한 마리면 집 한 채를 샀을 때였죠. 생활이 어렵다보니 어린 마음에 돈벌이가 되는 일을 하게 되더라고요. 부모에게 물려받은 소를 번식하는 기술을 배워서 사육하기로 마음먹었죠”


당시만 해도 농사로 일 년 열두 달 일해 봐야 소 한 마리 키운 것보다 못한 시절이었다. 소를 잘 키워 집안 경제를 일으키자는 마음에 어느덧 농사는 부업이 되었고 축산에 모든 관심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소를 사육하면서 다시금 어려움에 봉착했다. 자금회전이 너무 느렸기 때문이다.

사료 값과 농장 경영비를 충당하다보니 생활비조차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은행에 손을 벌렸다. 농협에서 대출받아 2년간 경영하고 다시 소를 되팔아 갚는 식이었다.

“처음으로 제 손으로 키운 소를 팔고 나니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결혼도 안한 제가 그 때 자식 가진 부모의 심정을 알겠더라고요. 소의 빈자리만큼 제 마음도 뻥 뚫린 것 같았습니다” 문제는 이 같은 허전함이 그 때뿐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축사를 운영하는 사람, 특히 소를 사육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쳐야하는 관문이란 것을 당시에는 몰랐다고 한다. 지금은 소를 웬만큼 키워서는 생활에 큰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경쟁이 심해진 탓이다. 예전같이 소만 키워두면 곧장 팔려가는 시절은 지났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홍 씨는 새롭게 축산업을 하려는 후배들이나 귀농하는 분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축산과를 졸업하고 바로 업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참 드물어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크기 때문이죠.

안정적으로 축사를 운영하려면 적어도 100두는 가져야 하는데, 현 시세로는 약 5억원이 들거든요. 그것도 땅과 축사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로 말예요” 간혹 연고지 없이 한우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왔다가 산산이 조각난 꿈을 들고 돌아가는 후배들을 볼 때마다 안타깝다는 그는 “이제는 의욕만 가지고서는 안 되며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래도 이 길을 가야겠다면 작은 두수부터 시작하고 선배들의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축협이나 기술센터의 교육에 빠짐없이 참석해 현장 기술을 습득하는 것도 좋은 자세라고 한다. “한우 가격은 전보다 많이 내려갔어요. 한 마리 팔아서 남았던 수입이 이제는 다섯 마리는 팔아야 하는 시대라고 볼 수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층 관리가 까다로운 무항생제와 해썹(HACCP) 인증을 포기 하지 않는 이유는 홍성한우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란다. 30년 간 한우를 기르며 세 자녀를 기르게 해 준 고마움의 보답이다. 축사와 함께 경영하는 밭(3만3000㎡)에는 사과·배·참다래 등 과수와 상추·배추·고추·파 등 없는 것 빼고 다 심겨져 있다.

뿐만 아니다. 논(4만 6200㎡)을 빌려 논농사도 겸하고 있다. 축사 하나 관리하기도 벅찬데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농부로써의 꿈을 이어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논농사를 지어 볏짚을 한우에 먹이고 그 축분을 다시 논과 과수원의 거름으로 사용하는 순환농법을 실시하고 있다.

순환농법으로 에너지를 절약하여 부족한 농가 경영을 메꾼다. 겨울철 밭에는 보리를 심고 논에는 호밀 등 녹비작물을 심어 조사료 이용도 높이고 있다. 농가 경영을 하면서 굵직한 일은 홍 씨가 맡고 나머지는 아내 박명숙 씨의 손을 빌린다. 농사일은 시집 와 처음 접해본 그녀는 부지런한 남편으로 인해 나름 고생도 많았다고 한다.

“부지런한 남편의 생활 패턴에 맞춰야하니 몸이 많이 피곤했어요. 시집 전 농사일은 전혀 돕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남편이 힘들게 일하는 게 보이는데 집안 일만 돌보기도 그렇잖아요. 소를 팔아도 넉넉하게 사는 것도 아니고. 덕분에 저도 부지런해졌죠. 남편처럼 기술은 없어도 자잘한 일들은 제가 다 해결하고 있습니다”

농사 경험이 없는 아내가 매일같이 소똥 냄새를 맡으며 오늘까지 걸어와 준 것이 고마운 홍영표 씨. 그는 묵묵히 뒤에서 내조해 준 아내가 없었다면 농사일은커녕 축사 운영도 어려웠을 거라고 말했다.  얼마 전 다시 구제역 소식이 전해지면서 바짝 긴장하고 있다는 아내는 “물론 구제역 백신을 맞아서 큰 위험이 없는 것은 알지만 혹시나 모를 일에 대비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축사 안과 밖, 도로 청소는 부부에게 빼놓을 수 없는 하루 일과 중 하나다. 구제역 같은 경우는 누구의 탓도 아닌 오직 본인 책임이라고 입을 모은다. 추운 날씨에도 아침저녁으로 축사를 돌보며 소들에게 말을 건네는 이들 부부. 말수가 적은 홍 씨도 소를 앞에 두고는 조근조근 속삭인다.

그럴 때마다 소들은 주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호수 같은 눈망울을 깜빡이며 주인에게 화답한다. 서로의 교감이 싹트는 시간이다. 슬하에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둔 이들 부부는 “나중에는 자녀들과 함께 농업과 축산을 연계한 6차 산업에 도전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가족과 함께 꿈을 만들어가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홍성한우 명장으로 우뚝 선 홍영표 씨의 앞날을 응원해 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