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압적 시대를 기억하는 은밀한 단어, 부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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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압적 시대를 기억하는 은밀한 단어, 부라자
  • 윤여문<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승인 2015.06.12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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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녔던 중학교는 서울 마포에 위치한 100년 전통의 명문 사립학교이다. 편도 2차선 도로를 경계로 건너편에는 서강대학교가 있고, 15분 거리에는 이화여자대학교와 연세대학교가 위치해 있다. 1980년대, 그러니까 제5공화국 시절에 이러한 몇 개의 대학교와 맞붙어있는 중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축복을 넘어 행운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3월에 개학하여 한 달여간 새로운 학년에 적응하고 나면 중학생들은 4월의 따뜻한 봄바람과 함께 다소 늘어지기 마련이다. 이 시기에 큰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우리의 서강대학교 형님들과 누님들은 서서히 데모를 시작한다. 인접한 우리 중학교는 그들이 데모를 시작하면 최루탄 냄새에 자율학습은커녕 정규수업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대학생들은 매우 고맙게도 중학교 정규수업이 끝나는 오후 3시쯤이 아닌 오전11시나 12시쯤 데모를 시작해준다. 일단 교실 밖 저 멀리서 ‘빵, 빵’하고 데모의 시작을 알리는 최루탄 소리가 들리면 잠시 후에 담임선생님은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으며 헐레벌떡 들어와 “오늘은 데모 때문에 수업을 할 수 없다”는 짧은 말로 종례를 대신한다. 그러면 학생들은 부리나케 책가방을 싸고 교실을 빠져나온다. 참 고마운 일이다. 특히나 무서운 선생님의 수업이 있거나 쪽지 시험이 예정되어 있는 날에는 더욱 대학생 형님들과 누님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중학교 학생회장 명의로 감사장이나 감사패를 전달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이다.

4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점심시간부터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먹던 점심을 입에 꾸역꾸역 집어넣으며 익숙한 듯 책가방을 쌓기 시작했다. 잠시 후, 예정된 식순처럼 담임선생님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으며 뛰어 들어와 “집으로 바로 돌아가라”는 짧은 종례를 뒤로하고 사라졌다. 학생들이 교실을 나서려는 찰나, 맨 뒤에 앉는 문제아 한 놈이 큰소리로 흥분하며 소리쳤다. “야, 지금 이화여대에서는 여대생들이 부라자만 입고 데모하는 중이래!!” 굉장한 충격이었다. 여대생이, 그것도 금남의 학교인 이화여대 여학생들이 ‘부라자’만 입고 이 벌건 대낮에 데모라니. 사춘기의 중심에 서 있는 열다섯 살의 나에게는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깊은 생각에 잠겼다. 등하교 길을 항상 같이 다니는 단짝 친구 두 명의 재잘거림도 들리지 않았다. 귀가하는 내내 꽃같이 예쁜 이대 여학생들의 충격적인 데모 장면만이 머릿속에서 맴돌 뿐이었다. 거의 집에 도착했을 무렵, 나는 친구들에게 우리가 아무래도 이화여대를 방문해야겠다는 제안을 했다. 친구들도 이미 예상을 했는지 짐짓 참전을 앞둔 병사처럼 비장하고 결의에 찬 목소리로 나의 제안에 동의했다.

이화여대로 가는 길은 험난 그 자체였다. 바람이 정확히 우리 쪽으로 향했기 때문에 맵고 따갑고 구역질나는 최루탄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다. 더군다나 늦은 4월의 따뜻한 햇살 덕분에 최루탄 가루는 땀과 어울려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있어 매우 견디기 힘들었다. 우리는 그러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오직 ‘부라자’만 입고 데모 하는 여대생을 보기 위해 고단한 길을 전진하고 전진했다.

이화여대 정문에 도착했을 때 우리의 얼굴은 콧물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소매로 따가운 얼굴을 연신 씻어내며 ‘부라자’만 입고 데모하는 여대생들을 찾으려 애썼지만 그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린 내가 본 것은 여러 대학교 학생들이 연합하여 처절하게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폭압의 시대에 지성인의 소임을 다하고 있는 장면뿐이었다. 아무리 외쳐도 들리지 않는 대학생들의 구호는 그들이 던지는 돌과 화염병처럼 멀리 뻗어나가지 못하거나 허공에서 검은 그을음으로 산화되기 일쑤였다. 오히려 최루탄을 쏘아대는 총과 장갑차의 파열하는 소리에 맥없이 묻히곤 했다. 아마도 대학생들은 ‘독재타도’라는 짧은 구호와 거친 돌멩이 그리고 조잡스럽게 만든 화염병만으로도 민주주의를 위한 항의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당시의 어린 나에게도 의미 없는 행위라고 느껴졌지만, 그것은 상식이 통하지 않았던 암울한 시대를 어쩔 수 없이 조우한 젊은이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는 것을 먼 훗날 알게 되었다. 1980년대의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기억하는 나만의 우스꽝스럽고 은밀한 단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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