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산중학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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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산중학교의 역사
  • 편집국
  • 승인 2008.06.04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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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홍성군 갈산면 지역에는 갈산초등학교 만이 유일한 교육기관이었습니다. 홍성군청 소재지로부터 약 12킬로 서쪽지방에 위치한 갈산은 주위 서부, 결성, 구항면과 예산군의 덕산면 일부와 서산군의 고북면 일부를 포함한 6개면 지역의 생활권뿐만 아니라 학교까지 갈산국민학교로 다니던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또한 갈산은 5일장이 성시를 이루던 시절이었습니다. 민족의 비극인 전쟁이 나면서 북한군이 우리지역까지 점령하게 되자 갈산초등학교는 점령군 훈련장으로 내주고 학생들은 산으로 들로 다니면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3개월후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지역사회와 학교는 폐허가 되었지만 교육열은 강화되어 마침 서울 경신 학교장이던 유병민 선생님은 이건엽 선생님 댁에 피난 차 내려와 계시다가 무료하여 이건엽 선생 댁 대청에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을 모집하여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학생 수가 30여명에 이르자 개인집 대청에서는 할 수가 없어 이건엽 선생님은 갈산학교 10개 교실이 남아있어 빌려 그곳에서 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시절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각기 과목을 분담하여 중학교 과정의 교육을 가르쳤습니다. 그때부터 갈산지역의 유지들은 갈산에 중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뜻을 모으고 종종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서부면 유지들이 갈산 김준규씨댁 99칸 저택을 헐어다 서부중학교를 세운다고 계약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갈산지역의 유지들은 깜짝 놀라 계약을 해지하고 갈산에서 그곳에 중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뜻을 모으고 여러 유지들은 착수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저택 주인이던 최오백씨를 설득시켜 서부유지들과의 계약을 해지하게 하고 서부와는 백미 300가마니대로 배상하여 주면서 갈산 우체국 한옥관사 60평 건물을 사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돈이 문제였습니다.
긴급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회장에 김홍진씨 부회장에 박찬규씨, 이태규씨, 이칠규씨, 전필진씨 총무에 이건엽씨 150가마 총무 이건엽씨가 70가마대를 내놓으니 유지들과 이사들도 적극 협조를 하여 추진위원회 측에서는 면민총회를 개최 1000여명이 모여 찬동 적극 협조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중학교 인가를 받기가 어려운지라 당시 문교부가 부산으로 피난 가있는 상황에 회장과 총무는 세 번을 다녀온 후 드디어 1951년 12월 4일 인가를 받았습니다.
개인 저택을 백미 900가마대로 매입은 하였으나 교실로 만들기까지 많은 돈과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각 마을 별로 쌀마대를 짊어지고 가가호호 방문 할당한 금액을 쌀로 거두었습니다. 드디어 교실 4개 교장실 교무실 서무실이 완공되어 1952년 2월 1일 개교하게 되었습니다.
갈산국민학교에서 1년 중학교 과정을 공부한 학생들을 2학년으로 편입하고 그해 초등학교 졸업하는 학생들은 국정시험을 거쳐 입학하였으니 갈중 제2회 졸업생입니다. 한편 서부중학교는 우체국 관사를 헐어다 놓고 학교부지를 이호리와 산남지역으로 하자는 의사충돌로 학교를 개교하지 못하고 초등학교에서 공부한 1회 졸업생을 내었으나 폐교하여 갈산중학교로 편입을 하였습니다.
그 시절 전쟁이 끝난 시절이라 경제가 어려워 선생님들의 보수를 제대로 주지 못하고 주민들이 춘추로 내주는 보리와 벼 등 학생들이 내는 수업료에 의하여 주었습니다. 그 후 옆 건물 두칸을 다시 만들어 신입생을 입학 시켰으며 운동장가에 있는 주택들을 주민들의 부역과 학생들의 방과 후 작업으로 넓혀 나갔습니다. 그래도 고래 등 같은 기와집 교실에 솟을대문의 위용과 잘 가꾸어진 정원이 있어 아름다운 학교로 유명하였습니다. 올해로 1만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여 사회 각 분야에서 훌륭한 일꾼으로 활약하고 있는 역사 깊은 학교입니다.

설립취지문 작성자 임태환
(주.원본을 교정없이 게재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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