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중턱쯤 올랐을까. 숨도 차지만 산천의 정기가 내 몸에까지 스며드는 것 같다. 잠시 좌우를 둘러보다가 무더기로 피어있는 진달래 옆에 자리를 정하고는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 꽃잎을 따다가 가시는 임 앞에 뿌리겠다고 노래한 옛 시인이 생각난다. 나 또한 누구 못지않게 진달래를 별나게 좋아한다. 한동안 옆의 꽃무더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어찌 이렇게 자태가 아름다운가. 유년 초등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봄이 되면 산에 올라가 지천으로 피어있는 진달래꽃 잎을 따다가 먹기도 하고 두견주 만드는 읍내 양조장에 가서 팔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엄청 어렸을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했으니 요즘 아이들과 비교가 안 된다. 고운 분홍색 꽃, 내가 시집오던 날 입었던 한복의 색깔이다. 결혼하고 첫 해 시댁에 살면서 봄이 되니 친정이 그리웠다. 저녁때 해질 무렵, 작은 대문 밖에 나가서 꽃 산을 올려다보면 분홍빛이 온 산에 가득한 채, 석양빛을 받는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한동안 바라보노라면 고향 그리던 마음은 차츰 누르러지면서 흰 구름 뜬 날의 수평선처럼 고요해졌다. 그리고는 진달래와 주홍빛 저녁노을에 푹 취하여 감상에 젖은 채 묵묵히 서 있다가 집으로 들어오곤 했다. 그때 그 시절이 그립다. 진달래는 고향 선산에도 많이 피었었기에 그렇게 위안을 주었었나보다. 어릴 때부터 나를 동무해 주던 그 많던 꽃들이 지금은 다 어디로 갔는지 갑자기 서글픈 생각이 든다.
한참을 걷자 산 정상이다. 정상이라고는 하나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다. 이쪽저쪽 드물게 피어 있는 진달래를 왔다갔다 한동안씩 마주하다가 하산하려고 발걸음을 놓았다. 오늘 같은 날은 등산하는 시간이 조금 길어진다. 몇 걸음을 놓았을까. 눈을 들어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때다. 하늘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 둥근 해가 동쪽 산 위에 쑤우욱 반쯤 얼굴을 내밀었다. 이 또한 장관이 아닌가. 요즘은 아침 일곱 시 전에 해가 뜬다. 사철 내내 부지런만 떨면 시골에서는 매일 해맞이를 할 수 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일 년에 몇 차례 별러 차를 타고 멀리까지 가서 해맞이를 하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네는 매일 누릴 수 있는 복이며 시골에 사는 대가이기도 하고 보람이다. 이제는 헤어질 시간, 내일을 약속하고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잰걸음을 놓는다. 집에 다다라 다시 동쪽하늘 바라보니 둥근 해가 산위로 불끈 솟아 있다. 조금 있으면 찬란한 봄볕이 온 마을 가득하겠지. 경운기 소리 탕탕탕 울린다. 앞집에서 나는 소리다. 논에 가려나보다. 예전에는 봄이 되면 꼭두새벽에 소 몰고 지게에 쟁기를 지우고 논으로 나갔는데 그런 모습은 사진에서나 볼 수 있다.
봄 향기 가득한 하루가 시작이다. 햇살 퍼지면 텃밭에 김을 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