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성은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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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성은 살아있다
  • 손규성(언론인·칼럼위원)
  • 승인 2015.08.07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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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성을 가로질러 시냇물이 흐르던 물길 입구 터, 즉 수구지(水口址)가 최근 발견됐다고 7월 28일 홍성군과 백제문화재연구원이 발표했다. 이는 홍주성 관련 고지도에 관아건물 40여 채와 함께 수록돼 있던 수문의 존재가 확인된 것이어서 홍성군민 모두의 관심을 끌만한 사건이다. 홍주성 옛 지도에는 시냇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수문이 동문과 서문에 표시돼 있다. 따라서 서쪽의 시냇물(즉 월계천) 일부 줄기가 성내로 흘러 들어와 동쪽 수문을 통해 홍성천과 합수한 것으로 추정해왔다. 그러다가 그 존재가 이번에 확인된 것으로, 그동안의 추정이 모두 옳았다는 것을 반증한 셈이다.

이번 물길 터의 발견이 더욱 주목받아야 하는 점은 홍주성과 관련된 옛 지도이거나 기록물이든지 모두가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물길 터의 존재는 1969년 홍양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홍양사(洪陽史)>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이 책 연혁편 18쪽에는 “고종 7년에 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신축 및 개보수를 하면서....(중략) 천정(우물) 2개소, 못 4개소를 다시 만들고 동서에서 수문을 신축하여, 서문에서 물을 끌어 서편 수문에서 동(東)수문으로 통하여 금마천으로 흘러가게 하고, 동·서·북 3문에는 문루를 신축하여 경오년 2월 2월 27일에 준공을 하였다고 한다.”고 쓰여 있다.

홍주성은 성이 외부세력의 공격에 대비한 수성을 위해서 물 공급시스템을 자체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성 밖에서 안으로 물을 끌어오는 수문을 축조하고, 이를 저장하는 연못과 우물을 새로 파는 유비무환의 태세를 갖췄다고 볼 수 있다. 한응필 목사의 이런 홍주성의 정비는 고려시대 최충헌의 아들인 최향의 난과 임진왜란 중에 발생한 이몽학의 난 등이 홍주성에서 진압되는 등 지정학적 및 군사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라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래서 그러한지, 당시 조정에서는 한 목사의 홍주성 정비사실을 보고받고, 크게 칭찬한 뒤 10월 15일 당시 실권자였던 대원군이 친서로 3개 문루의 문액을 지어 하사한다. 즉, 서문은 경의문(景義門), 북문은 망화문(望華門), 동문은 조양문(朝陽門)이라고 명명하였다. 각 방면의 문액은 갑오년 동학농민봉기, 병오년 항일의병투쟁 과정에서 훼손됐고, 일제강점기 때 서문과 북문이 철거 훼손됐다.

수구지의 발견발굴은 홍주성이 역사적 사실을 듬뿍 머금고 살아있음을 웅변하는 것이다. 옛 지도에 나온 홍주성 안의 40개소가 넘는 목사나 관찰사의 행정집무 건물들도 모두 실재 존재했었다는 것도 덩달아 증명된 셈이다. 이 건물들의 복원은 홍주성을 과거의 존재에서 현재의, 미래의 존재물로 만드는 것이다. 홍주성이 옛 것을 갖춰 살아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은 과거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홍성이 앞으로 살아갈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될 것이다. 생명이 없는 돌덩이들의 성곽이 아니라 선인들의 삶과 생활이 녹아있는 시대와 역사의 현장으로 되살아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홍성이 여전히 지역적 상징성을 갖는다는 것을 내포한다. <홍양사>에 따르면 한응필 목사가 홍주성을 개축할 때 “남포 30명, 보령 20명, 온양 15명, 서산·태안·해미·결성·덕산·청양·비인 등에서 각 10명씩의 석공을 동원해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홍주성을 위해 그 관할지역 주민들은 고단한 품을 팔았다. 홍주성은 홍성사람들만의 삶의 현장은 아니었던 것이다. 물길 터의 발견은 홍주성이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며, 그것의 생환을 함께 나누는 계기가 됐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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