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계절의 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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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계절의 징후
  • 권기복(홍주중 교감·칼럼위원)
  • 승인 2015.08.07 13: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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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달력이 펼쳐지기 무섭게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문만 열어도 후끈후끈한 공기가 숨을 멈추게 할 정도이다. 우리 별 곳곳에서 폭염으로 인해 사망자가 속출한다는 뉴스도 보였다. 대구지역은 37℃를 넘나들고 있다고 한다. 우리 고장은 대구보다는 2~3℃는 낮으니, 그나마 다행이리라. 새벽에 밭에 가신 어머니는 점심때가 가까워졌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아침 밥상은 큰누이와 함께 차려서 먹은 지 오래였다. 어머니가 미리 만들어 놓은 반찬과 밥통에서 밥을 퍼 담아서 안방으로 상을 들어다가 내놓았다. “에미는 언제 먹으려고 안 온다니? 슴다디게...” 어머니가 차려주지 못한 밥상에 대한 서운함 반, 식사 때가 되어도 오지 않는 발걸음에 대한 걱정 반을 섞은 할머니의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다. 매미들의 합창은 점심때를 향해 최고조를 뽐내고 있었다. 앞뒷문을 전부 열어젖힌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더운 열기는 등줄기를 따라 산골짜기 물 흐르듯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할머니와 아버지, 어린 동생들이 먹을 점심상을 안방에 들어다 놓고, 큰누이와 함께 집을 나섰다. 그림자가 발바닥 밑으로 기어들어간 마을길은 금세까지 불길에 휩싸였던 아궁이 같았다. “오빠! 엄마는 어디로 가셨을까?” “흐음! 아마 노룻재 밭에 계실거야.” 우리 밭은 넓은 것도 없고, 마을에서 가까이에도 없었다. 전부 오리 길은 걸어가야 되었고, 드문드문 조각밭들이었다. 그 중에서 노룻재 밭이 가장 멀었다. 거리가 가장 먼만큼 어머니는 식사 때가 되어도 집에 오시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유난히 키 작은 누이는 종종걸음으로 좇아왔다. 고갯마루 가까이에 있는 밭이기에 오르막을 타는 발걸음마다 땀자국이 찍힐 정도였다. 누이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잠시 골짜기를 흐르는 시냇물로 세수를 하고 밭에 다다랐다. “엄마, 없어!” 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밭을 둘러보다가 당장 울음보를 터뜨릴 상황이었다. “저기 있잖아!” 옥수수 밭 사이로 어머니의 모습이 얼핏 비추이는 곳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엄마, 엄마!” 누이의 눈물 맺힌 눈은 금방 웃음으로 가득 찼다. “으응! 니들이 웬 일이냐?” 어머니는 어렵사리 허리를 펴며 몸을 일으켰다.

머리에 둘렀던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으시는 사이로 반가움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엄마! 밥 가져왔어. 이리 와서 밥 먹어!” 누이는 보자기를 풀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구! 이 더운데 니들이 밥 가져오느라고 욕봤구나.” 어머니는 그늘자리에 앉아 아침 겸 점심식사를 하였다. “엄마, 가을은 언제 와?” 누이는 아직까지 벌건 얼굴의 땀을 닦아내었다. “가을은 벌써 다가오고 있단다. 저것 봐! 고추잠자리들이 떼를 지어 날아다니지 않니? 저기 언덕에는 노랗게 산국화도 피었잖아. 길가에 코스모스도 피기 시작하였네. 우리들이 하찮게 여기는 식물이나 곤충들이 계절을 더 빨리 알아차린단다.” 누이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피, 가을이 이렇게 더워? 아직 멀었잖아!” 어머니는 빙그레 웃기만 하셨다. “오늘은 너희들 덕분에 점심도 챙겨먹었네. 고맙다.” 남은 일을 마무리 짓고 오겠다는 어머니와 헤어져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고추잠자리와 코스모스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 후 40년이 지난 오늘도 고추잠자리가 여러 마리 날아다니고, 섣부른 일이나 아닌지 몰라도 코스모스 서너 송이 피어올라 바람결에 춤추고 있다. 어느 새 우리 곁으로 가을은 한걸음 한걸음씩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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