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식이와 집단주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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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식이와 집단주의 경계
  • 이재인 칼럼위원
  • 승인 2018.07.19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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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화 필 때 전학간 친구 법대 갔지만 교사 자원해

마흔 살에 간암으로 떠나

봉선화 피어나는 여름이 오면 전학 간 친구가 떠오른다. 봉식이네 마당에는 뻐꾸기가 울다가 사라지면 언제나 봉선화가 풍년이었다. 풍년이던 그 해 봉식이는 서울로 삼촌을 따라 전학을 갔다. 말하자면 그 애는 모범학생이었다.

공부 잘해서 석차가 67명 가운데 늘 1등에서 2등을 오르내렸다. 다른 친구들처럼 사과밭이나 원두막 울타리를 넘는 생쑈를 하지 않았다. 앉으면 책을 읽거나 흰 구름 둥둥 떠다니는 하늘이나 고추잠자리를 바라보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뱉고는 했다.

나를 비롯한 우리 반 애들은 어른스런 봉식이를 왕따시키는 묘안을 짜냈다. 왈패스럽고 지랄발광하는 별명이 봉식이를 ‘뽕뽕 방구대장’이라고 덮어씌우면서 합창 지랄을 시켰다. 이런 발광은 교실에 선생님이 안계시면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반복됐다. 그러니 친한 친구조차 하나 둘 슬슬 떨어져 나가고 마침내 고립돼갔다.

마침내 봉식이가 전학을 갔다. 그는 서울에 가서도 많은 경쟁자들 사이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소위 일류 대학에 진학했다. 그것도 법과대학에 진학했지만 고시를 그만두고 교사를 자원했다. 그런 봉식이네 식구들한테는 청천하늘에 날벼락 같은 사건이었다. 등 떠밀리면서 남들이 부러워할 겉보기 행복보다는 시골에 가서 교사로서 봉사할 각오였다. 그리고 자신이 집단 따돌림 시키는 것과 같은 부조리한 현실을 행복의 매카니즘을 창조한다는 각오였다.

그러니까 봉식이는 자신의 꿈과 희망을 실현하지도 못하고 40세 나이에 간암으로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엊그제 그 친구를 회고하는 문집을 발간하는 동창회를 구성해 잔잔한 기쁨을 맡아 볼 수 있었다. 결론은 위험한 집단주의가 얼마만큼 잔혹하고 위험한 일인지를 봉식이를 통해 깨닫게 됐다.

다수결 원칙, 집단적 저항과 돌격적인 떼법으로 세상을 뒤집겠다는 집단주의 숭고자들에게 주는 충고다. 집단주의는 선동과 다수를 빌미 삼는다. 봉선화 피는 여름날 유년기 철없이 친구를 모략한 얼굴들은 오늘도 개고기 보신탕으로 장수를 꿈꾸며 복날 수저를 들었다. 개는 짖어도 열차는 간다…. 그러나 남다른 길을 걷는 이에게 박수를 치는 일도 귀한 일이 아닌가. 

이재인<충남문학관장·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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