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의병 봉기 이후 동향과 1910년대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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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병 봉기 이후 동향과 1910년대 독립운동
  • 동북아역사재단 장세윤 수석연구위원
  • 승인 2018.08.28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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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 유학<9>
자정·치명이라는 길을 택한 이근주 선생의 묘소. 원 안은 이근주 선생.

1919년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 100주년을 앞두고 각계에서는 여러 가지 기념사업과 학술회의, 기념관 건립 등 다양한 사업과 행사, 기념 이벤트 등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호서유림, 홍주 유림주도의 홍주 의병봉기나 유림주도의 파리장서 운동, 내포(內浦)지방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전개된 각종 독립운동과 민족운동 등의 동향이나 관련 인물, 단체 등에 대한 관심은 별로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 강연자는 홍주의병 봉기의 사례분석과 1910년대 독립운동의 지속성과 연관성을 검증해 보고자 했다. 이를 통해 현재까지 상대적으로 연구가 미진하다고 평가되고 있는 홍주 의병봉기의 역사적 의의와 그 이후 내포지방 독립운동의 경향을 추출코자 했다.


의병전쟁·구국계몽운동 대립적 운동형태 아닌 밀접한 보완관계
2차 홍주의병 종료 뒤 대한광복회·3·1운동·파리장서 등 지속
한말 유교지식인 현실참여 시대 초월하는 공통 가치와 보편성


1896년 초와 1906년, 1,2차 홍주의병에 참가한 주요 인물들의 행적과 이념, 활동을 개략적으로 검토해봤다. 그 결과 이들의 행적은 매우 다양했다. 비록 두 차례에 걸친 의병봉기는 표면적으로는 실패로 끝났지만, 향후 민족운동, 독립운동의 발전에 끼친 영향을 고려하면 그 성패를 단순하게 논할 것이 못된다고 볼 수 있다. 즉 홍주의병 봉기는 추후 여러 방면에서 자못 중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물론 발표자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인물들의 활동 사례나 귀중한 자료, 사실도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1896년과 1906년 약 10여년을 사이에 두고 두 차례나 전개된 홍주의병 봉기는 1900년대 초부터 1930년대 초까지 비교적 다양한 형태의 투쟁방법론과 참여인물, 조직·이념을 통해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에 연계되었다. 특히 여기에 투신한 참여인물들을 통해 일정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던 호서지방 서부지역(내포지역, 또는 홍주 일대)사의 한 단면을 파악할 수 있었다. 또 의병전쟁과 구국계몽운동은 서로 대립적인 운동형태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 밀접한 보완관계에 있는 운동방법론이라는 사실이 논증되었다. 

1894년의 갑오왜란(甲午倭亂,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을미사변, 잇따른 변복령과 단발령의 공포, 그리고 을사5조약의 강제체결 등으로 야기된 국내정세의 급변은 충남 서부지역 유생들에게 커다란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사태는 주자학(성리학)적 의리론과 이단론, 명분론에 입각해 강력한 위정척사의 논리를 개진하고 있던 유교지식인들로 하여금 의병봉기를 촉진하게 하는 주요 계기가 됐다. 두 차례의 홍주의병 봉기는 그러한 논리의 구체적 실현과정이었다. 물론 홍주의병의 주도층이 대체로 보수적 유교이데올로기를 근간으로 한 유생층(儒生層)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또 이들도 보수적이며 배타적 사승관계(師承關係)에 따른 학통(學統)이나 혈연(血緣), 지연(地緣) 등에 기반해 의병봉기를 추진하는 전근대적 모습과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부분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들 역시 시대의 흐름과 국제정세의 변화를 기민하게 포착해 스스로 변모하는 자세를 보임으로써 능동적으로 향후 여러 형태의 독립운동, 민족운동을 주도했던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1906년 제2차 홍주의병 봉기가 종료된 뒤에도 참가자들은 의병항쟁을 지속하거나, 학교 등을 통한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고, 일부 인사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정(自靖)·치명(致命, 殉國)이라는 극단의 길을 걷기도 했다. 향후 이들의 동향은 1910년대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참여와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주도, 그리고 3·1운동 참가 및 주도, 나아가 유림(儒林) 주도의 ‘파리장서’ 서명 참여 등 다양한 형태로 지속됐다. 특히 이만직(李晩稙)과 이용규(李容珪)는 1919년 국민대회 및 한성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했다는 점에서 대단한 변용의 모습을 보여줬다. 충무공 이순신의 후손인 이세영(李世永)과 이상린, 한훈(한우석) 등은 해외로 망명해 공화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유교지식인의 놀라운 사상변용과 변신을 보여준 사례라고 할 만하다.

더 멀리 보면 홍주 의병항쟁의 맥락이 1910년대와 1920년대는 물론 1930년대 초까지 면면히 계승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김좌진(金佐鎭)이나 윤봉길(尹奉吉) 등 항일무장투쟁과 의열투쟁 등의 형태로 민족해방에 크게 기여했던 독립운동가들도 직·간접적으로 홍주의병의 연원과 연계되는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의병전쟁이 독립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하며 이후 독립운동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기존의 통설을 구체적 사례로써 재확인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한말(韓末) 유교지식인들의 현실참여와 대의명분이 시대를 초월하는 공통의 가치와 보편성을 띠며 나름대로의 일정한 기능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특히 상당수 인사들이 보수적 복벽주의 이념에서 벗어나 공화주의(共和主義) 이념을 수용하고, 나아가 사회주의자들과 연대해가는 양상을 보이는 점은 새로운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홍주의병 참여자 가운데 일부가 사회주의자로 전환하거나 1930년대 혁명적 농민운동이나 노동운동, 혹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에 합류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아직 상세히 검토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사회주의운동에 투신한 인물도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세월의 흐름에 따른 노령화 현상을 감안하면 193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민족(독립)운동에 투신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지만 추후 상세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 훈(韓焄), 한우석(韓禹錫)이나 정태복(鄭泰復) 등은 의열투쟁이나 신간회(新幹會)조직을 통해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활동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공명(共鳴)과 사상적 전환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두 차례의 홍주의병 봉기는 주로 유생층에 의해 영도되었기 때문에, 외세(일본의 침략)에 대한 투쟁목표는 뚜렷한 반면, 우리민족 내부의 봉건적 혹은 전근대적 요소의 청산문제나 내부모순의 척결을 향한 계급투쟁적 요소는 미약했다. 물론 2차 봉기 단계에서는 평민층도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참가자들의 성분에 따라 투쟁목표나 이념, 양상이 약간 다른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는 당시의 사회적 여건과 시대상황을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2차 홍주의병 봉기시에는 다양한 세력이 참여했기 때문에 그 전개양상과 운동의 성격, 추후의 영향 등에 대한 분석·평가도 다양한 시각에서 가능할 것으로 본다.

홍주의병 봉기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사들은 대략 향후의 동향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 결과 이들은 대부분 투쟁 형태를 달리하면서 지속적으로, 때로는 자신의 이념을 전환해가면서 항일(반제)투쟁에 참여하고 여러 계열의 민족운동에 참여하거나 주도한 사실을 확인했다. 특히 초기의 위정척사적 이념에서 탈피해 시대의 흐름에 적절히 부응해가는 일면을 보였던 점은 한국근대사에서 의병운동의 선구적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들 주도층 이외에도 참여 병사와지지 세력을 비롯한 참가 대중들에 관한 심층적 고찰이 시급하다고 하겠다. 특히 상당수가 참여한 것으로 조사된 보부상(褓負商)과 포수, 아전(衙前), 기타 상인과 농민층 등의 향후 동향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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