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준산 아래 젖과 꿀이 흐르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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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준산 아래 젖과 꿀이 흐르는 마을
  • 취재=허성수/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8.09.15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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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일구는 색깔있는 농촌마을 사람들<24>

농촌마을 희망스토리-갈산면 가곡리 동막
가곡리 동막마을 뒤 삼준산이 석산개발로 속살을 드러낸 모습이 흉물스럽다. 그러나 산과 물이 좋아 귀촌인들에게는 전원주택지로 인기다.

갈산면 가곡리 동막마을은 서산군 해미면과 고북면의 경계에 접한 삼준산(三峻山) 바로 아래 있다. 옛날부터 워낙 골짜기가 깊어 홍성군에서는 가장 오지 중 오지에 속한 산간벽지였다. 해발 490m의 삼준산은 홍성군에서 오서산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명산이다. 높은 산봉우리 세 개가 형제처럼 나란히 걸쳐 있다고 해서 삼준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 가난한 마을에 일어난 농업혁명
동막은 우리나라에서 비교적 흔한 자연부락의 지명으로서 여기도 나름대로 유래가 있다. 마을 입구 동쪽으로 길게 뻗어내린 산줄기가 막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기도 하고, 동쪽 산줄기에 산막이 있다고 해서 동막으로 불려졌다는 해석도 있다. 또 동쪽 산줄기에 군막이 있었기 때문이라거나 마을에 돌이 많아서 그렇게 불려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삼준산은 돌이 유명하다. 동막마을 바로 뒤에 돌산이라는 지명을 가진 산도 있을 정도다. 그러나 20여 년 전부터 조경과 건축용 자재로 석산개발이 이뤄지면서 짙푸른 수풀 가운데 커다란 생채기가 옥에 티가 되고 있어 아쉽다. 마을 주민들과는 돌산 개발 초창기에 갈등을 잠깐 빚었을 뿐 업체와 서로 협력하면서 상생하고 있다고 한다.

동막은 노상과 함께 갈산면 가곡리에 속하는 자연부락으로 원래 삼준마을이 하나 더 있었다. 동막에서 더 깊은 산골을 향해 올라가면 높은 산에서 흘러 내리는 개울 주변에 형성된 산촌마을이었으나 1980년대 초 가곡저수지가 생기면서 물에 잠기고 말았다. 그 때까지 삼준에는 2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 바깥 쪽 삼준산과 동쪽으로 뻗어 내린 그 산줄기 사이에 큰 둑을 세우는 공사가 시작되면서 수몰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멀리 떠나게 됐고, 남은 예닐곱 가구는 둑 아래 동막과 노상마을로 이주했다.

고향이 없어진 삼준마을 주민들에게는 아쉬운 일이지만 가곡저수지가 완공된 후에는 삼준산 아래 동막과 노상 등 가곡리와 인근 마을들, 또 바로 이웃한 예산군 주민들까지 가뭄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됐다. 올해 여름 40일 이상 지독한 가뭄에도 동막마을은 비가 잦았던 봄에 가득 채워 놓았던 가곡저수지의 물로 넓은 들판이 마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가곡저수지의 계획저수량은 1398㎥, 수혜면적은 201ha이다.

그러나 가곡저수지가 없었던 시절에는 농사짓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동막마을 주변의 넓은 들판이 지금은 온통 벼가 자라는 논이지만 1980년대 이전에는 대부분 밭이었다. 마을에 한두 집 정도가 문전옥답을 갖고 있으면서 벼농사를 지었을 뿐 대부분의 주민들은 밭농사를 해야 했기 때문에 쌀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오죽했으면 바위산에서라도 쌀이 펑펑 솟아나기를 소원했을까. 동막마을에는 이런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삼준산 삼존사지 뒤 절벽 바위 밑에 조그만 굴이 있었다. 지금은 물이 솟아나는 약수터다. 그러나 오래 전 옛날 그 바위 구멍에서 쌀이 나왔다고 한다. 거기서 한 노파가 구멍에서 나오는 쌀을 받아 연명을 했는데 욕심을 부린 것이 화가 되고 말았다. 노파가 더 많은 쌀이 나오도록 나뭇가지로 바위구멍을 계속 쑤셨다. 그랬더니 바위구멍이 자꾸 작아지면서 쌀 대신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가곡저수지는 1980년 3월 착공해 1984년 1월 완공됐다. 그 후 동막마을 일대는 농업혁명이 일어났다. 온통 밭이었던 들판이 경지정리를 해 논으로 변했다. 자갈밭이 수리안전답으로 바뀌면서 주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수도작으로 전향했다. 대부분 주민들은 눈부시게 하얀 쌀밥을 매일 삼시 세 끼 먹을 수 있는 부농의 꿈을 실현해 나갔다.
 

가곡저수지가 1980년대 초에 생긴 후 동막은 비옥한 땅으로 변하면서 부촌이 됐다.

■ 귀촌인들에게 전원주택지로 인기
오늘날 동막에는 2개 반 50가구 9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산이 좋고 물이 좋아 귀촌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동네 가운데 하나가 됐다. 요새는 깊은 오지라도 자동차로 접근할 수 있는 도로를 갖추고 있어서 동막은 전원주택지로 인기다. 속살을 드러낸 석산의 모습이 다소 눈에 거슬릴 뿐 젖과 꿀이 흐르는 원시적인 자연의 품에서 조용히 살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청정지역이다 보니 조용한 데 살려고 오는 사람이 많아요. 요즘 10가구가 들어왔습니다. 유일하게 갈산면에서 우리 마을만 가구수가 늘었습니다.” 공충식 이장의 말이다. 삼준산은 소방도로가 잘 닦여져 있어서 등산객들에게 등산로로 활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가곡저수지에는 주말에 낚시꾼들도 많이 찾는 명소가 됐다.

■ 문중을 대신한 고향지킴이

공충식 이장

동막마을 공충식 이장은 주민들의 신임이 두텁다. “제가 33세 때 최연소 이장을 맡아 4년 정도 일을 봤다가 다시 맡았던 게 9년 전입니다.” 공 이장은 동막에서 태어나 줄곧 고향을 지키고 있다. 지금 한우 80두를 사육하고 벼농사만 4만 평을 짓는 대농이다.

“저는 200마지기의 수도작을 하는데 제 논은 많지 않습니다. 경영이양보조금을 받는 노인들의 것을 임대해 10년 동안 안정적으로 위탁영농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갈산면을 포함해 3개면 13개 마을에 걸쳐 임대한 노인들의 논에 농사를 짓는다. 5월과 10월 각 한 달 동안은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고 한다. 지금 갈산농협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군대에서 제대하자마자 가입한 조합원 경력만 40년이다.

“제가 조합 이사로서 기여한 일이라면 조합원 개인별로 실적에 따라 배당금을 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조합이 운영하는 하나로마트에 가서 뭐 하나 사도 이득금이 나오니까 많이 이용할 수밖에 없죠. 그만큼 조합원에게 배당금이 많이 돌아가도록 했기 때문에 지금도 갈산농협은 탄탄하게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공 이장도 청년시절 고향을 떠날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군 제대 후 외지에 나가 돈을 벌려고 했는데 공 씨 가문이 발칵 뒤집혔다. 당시 서울에서 집안회의가 열려 누군가 한 사람은 고향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며 공 이장의 이농을 극구 말렸다고 한다. 

“당숙이 저에게 소를 10마리 사주셨어요. 요놈 가지고 고향을 지키면 좋겠다고 부탁하셔서 눌러앉고 말았습니다.”

■ 젊은날 나뭇짐 팔러 다녀

조세관 노인회장

“옛날에 나무를 한 짐씩 지고 산길을 걸어 홍성장에 갔어요.” 조세관 노인회장은 젊은 날 동막에서 홍성까지 장보러 다닌 일을 회상했다. “하루 두 짐을 지고 왔다 갔다 했습니다. 20리길 왕복을 하루 두 번 하면 80리길이었죠. 쌀 한 되 팔아먹기 위해 산에서 나무를 해다 홍성읍내 가서 팔이야 했습니다.” 지금 세대들은 이해하기 힘든 옛날이야기다. 그러나 불과 40여 년 전만 해도 그랬다.

“저수지를 만들기 전 여기가 다 밭이었습니다. 논이 있어도 가물면 모를 못 심고 메밀, 콩, 옥수수를 심었어요.” 조 회장은 장리쌀을 얻어먹고 빚을 어렵게 갚았던 이야기도 했다.

“옛날에 한두 명이 괜찮게 살았을 뿐 다들 어렵게 살다가 저수지 때문에 먹고 살게 됐죠.” 지금 조 회장의 얼굴에는 보릿고개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밝고 건강했다. 2000평 규모의 논농사를 하는 조 회장은 팔순 나이가 무색할 만큼 갈산면 주민자치센터 풍물패 동아리에도 꾸준히 참여하는데 상쇠를 맡아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 시아버지 모시는 효부

최안순 부녀회장

최안순 부녀회장은 서울에서 9년 전 동막으로 귀촌했다. 작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지금은 홀로 남은 95세 시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효부다. 게다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몹시 바쁜 가운데서도 부녀회를 이끌며 동막마을의 며느리 역할까지 잘 해내고 있어서 어르신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다.



 

가곡저수지 아래 비옥한 평야.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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