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처리는 신중히, 재물은 절약, 부릴 때는 때에 맞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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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처리는 신중히, 재물은 절약, 부릴 때는 때에 맞게
  • 손세제 <철학박사>
  • 승인 2018.11.09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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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아카데미
사진 출처= https://image.baidu.com

공자 왈 “道千乘之國,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使民以時 천승(千乘)의 나라를 다스릴 때에는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이 있다) 국사(國事)를 처리할 때에는 일처리를 신중히 해서 백성들이 믿고 따를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재물을 사용할 때에는) 쓰기를 절약해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줘야 하고, 백성들을 부릴 때에는 때에 맞게 시행해 (백성들의 생업에 폐해를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

‘천승(千乘)의 나라’는 전차(戰車) 천승(千乘)을 낼만한 나라다. 고대에는 전쟁을 수행할 때 보유한 전차의 수를 헤아려 전략을 세웠다. 오늘날에는 보병전·공중전·수상전 등 다양한 형태의 전쟁이 수행되고 있지만 고대에는 전차전이 주력전이었다. 그래서 보유 전차의 양은 국력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천자·제후·대부의 위의(威儀)도 보유 전차의 양에 따라 내용이 정해졌다. 천자의 나라는 천하(天下)를 그 나라로 하는 만큼 그 국력이 전차 만승(萬乘)을 낼만하다 해 ‘만승지국(萬乘之國)’이라고 불렀고, 대부(大夫)의 가(家)는 사방의 넓이가 전차 백승을 낼만하다 해 ‘백승지가(百乘之家)’라고 불렀다. ‘천승지국’은 전차 천승을 낼만한 국력을 갖춘 나라니 규모가 제법 큰 나라일 것이다. 이 전차 천승을 낼 수 있는 나라를 다스릴 때 염두에 둬야 할 일이 있다.

첫째 국사(國事)를 처리할 때에는 ‘절차적 정의’를 준수해(敬事) 백성들이 믿고 따를 수 있도록(信)해야 한다. 고대에는 ‘제사’와 ‘전쟁’이 나라의 큰일이었다(國之大事, 祭與戎). 조상에 대한 제사를 가장 중시했지만, 토지신(神農)·천신(上帝)·산천(山川)의 신(神)에 대한 제사도 그에 못지않게 중시했다. 인지(人智)가 발달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종교나 신앙(百神)에 의지해 민심(民心)을 달래는 경향이 있다. 아마 제사보다 더 훌륭하게 사회를 통합하는 수단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제사가 국가적 차원에서 자주 거행됐다.

제사는 의식(儀式) 이상의 것이었다. 중국 고대에는 종교와 정치의 구분이 없었다. 서양의 경우에는 종교와 정치가 나뉘어져 있어 세속 세계를 관장하는 왕(王) 외에 신성 세계를 관장하는 교황(敎皇) 같은 존재가 있었지만 중국 고대에는 종교가 곧 정치였기 때문에 왕이 곧 교황이었다. ‘왕(王)’이라는 글자는 ‘三’의 한 가운데를 ‘丨’이 관통하고 있는 문양(文樣)이다. 천·지·인(天地人)의 이치를 통달한 듯한 모양새다. 왕에게는 정치적으로는 황제(皇帝), 도덕적으로는 성인(聖人), 학술적으로는 현인(賢人), 종교적으로는 천자(天子)의 권위가 있다고 봤다. 옛 사람들은 ‘역사’를 두려워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구분이 없는 사회에서 영원히 사는 길은 역사에 이름을 남겨 사람들의 뇌리에 기억되도록 하는 길 밖에 없다. 그들의 의식에서는 서구에서처럼 이 세계를 떠나 다른 세계로 간다는 것이 전혀 상상되지 않았다.

‘왕’이 된 자는 천상과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관장해야 했다. 그 중 하나가 잘못되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고 믿었다. ‘망(亡)’ 자와 ‘왕(王)’ 자의 차이를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왕’ 자는 ‘一’ 3개가 모두 연결돼 있는데 반해, ‘망’ 자는 맨 위의 ‘一’이 나머지 2개와 연결돼 있지 않다. 천·지·인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나라를 잃게 된다는 교훈이다. 그 위용(威容)을 ‘천자위의(天子威儀)’라고 표현했다. 천명(天命)을 받아 사해(四海)를 통치하고 천하의 도적(圖籍)을 관장하며 천하 만민의 생사(生死)를 주관하는 자라는 것이다.

‘전쟁억지력’도 나라의 중요한 대사(大事)였다. 군주는 어떠한 경우에도 ‘전쟁’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함부로 군사를 움직여서도 안 된다. 반드시 절차적 정의(敬)에 따라 시행해야 한다. 자칫 백성들의 삶을 황폐화시키고 나라의 운명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외교 관계에서도 절차적 정의는 매우 중요했다. 성급하게 체결된 조약(盟)은 향후 국가 운영에 치명적인 지장을 줄 수 있다. 고대에는 조약을 맺을 때 천지신명(天地神明)에게 맹세(信)하는 형식을 취했다. 개인 간의 약속에서도 천지신명의 저주를 빌었다. 신의(信義)를 저버리면 천지신명의 저주를 받게 된다고 믿었다. 이때에도 절차적 정의는 매우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에 위배된 맹세는 신이 듣지 않는다(神不廳)고 생각했다. 절차적 정의(敬)는 신성(信)의 필요조건이었던 것이다.

‘경사이신(敬事而信)’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 있다. 국가의 대사를 처리할 때에는 절차적 정의를 준수해 백성들이 믿고 따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천시(天時)는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人和)만 못하다(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는 말이 있다. ‘인화(人和)’는 ‘경사이신(敬事而信)’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둘째 재물을 사용할 때에는 쓰기를 절약해서(節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愛人). 고대에는 국가 운영에 필요한 모든 재화를 백성에게서 얻었다. 재정 지출이 많아지면 백성들의 부담도 가중됐다. 농업 분야에서의 부담이 제일 컸다. 먹는 사람은 셋인데(士·工·商) 생산하는 자는 하나뿐이니(農) 그 양이 풍족할 리 없다. 오늘날에는 과학 기술이 발달하고 공업을 이용해 재화를 생산한다. 그래서 재화의 부족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고대에는 자연(력)에 의존해 재화를 생산했다. 태풍이나 홍수·가뭄 같은 자연 재해가 일어난 해에는 생산 활동이 원활하지 못해 가용 재화가 턱없이 부족했다. 재화를 마음 놓고 쓸 수 없었다. 생산에 종사하는 일반 백성일수록 어려움이 많았다. 유랑하거나 굶어죽는 이들도 흔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국가와 사회는 유지되기 힘들다. 그래서 나라에서도 이럴 때를 대비해 재화의 소유와 지출 한도를 명확히 정해 이를 준수하도록 강제했다. 그 한계와 분수를 정한 규범이 바로 ‘예(禮)’다. ‘예’는 천자에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지켜야 할 덕목이요 윤리였다. 그것은 우주 성립의 근거이자 국가 존립의 기초라고까지 해석됐다(夫禮, 天之經也, 地之義也, 民之行也). ‘예’의 붕괴는 곧 국가 사회의 해체였다. 이 ‘예’의 실행에서 가장 중시됐던 덕목이 바로 ‘절용’이었다. 고대에는 왕(또는 왕실)이 근검절약해 타의 모범이 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생각했다. 취지는 ‘절용’을 생활화해서 재화를 생산하는 백성들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자는 것이었다. 운용할 수 있는 재화의 양이 충분하다면 백성들에게 가렴주구(苛斂誅求)를 행할 이유가 없다. 백성들의 부담이 경감되면 민생은 저절로 안정된다. 이것이 고대인들이 생각한 국가 운영의 기본 방침이다. 그래서 백성들을 사랑하는 일은 재화의 쓰임을 절약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셋째 백성을 부릴 때에는 ‘때’에 맞게 시행해 백성들의 생업(生業)에 폐해를 주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예전에는 황무지를 개간하거나 도로·교량·건물 등을 공역(工役)할 때 백성들의 노동력을 부역(賦役)으로 징발(徵發)했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부담해야 할 공부(貢賦)가 있었다. 이때 때(民時)를 고려하지 않고 공역(公役)을 일으키면 백성들은 생업에 전념할 수 없다. 모든 노력(勞力)을 경주해도 시간이 부족한 때에 공역을 일으켜 백성들을 징발하면, 생산 활동에 막대한 지장을 주어 백성들의 삶은 황폐화되고 국가는 세수(稅收) 확보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여기에서 운용(運用)의 묘(妙)로써 강구된 방안이 농번기(農繁期)에는 공역을 일으키지 않고 농한기(農閒期)에 공역을 일으키는 정책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특정 기간에는 징세를 유보하거나 분납 혹은 감경(減輕)해 주는 조치이다. 생산 활동과 공역을 함께 부담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 외에 별다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기계가 인간의 일을 대신하고 과학 기술을 이용한 특수 농법이 생산을 주도한다. 그래서 ‘민시(民時)’ ‘농시(農時)’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진다. 그러나 예전에는 자연(력)에 의존해 생산을 해야 했다. 때문에 ‘때’를 놓치게 되면 뒤에 아무리 큰 정성을 쏟아도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고대의 격언 중에 ‘때’와 관련된 교훈이 많은 것은 다 이 때문이다. 통치 권력이 민의(民意)에 의해 선출되지 않은 전제군주 국가에서도 피통치자로서의 백성들의 생업을 온전하게 보호하는 것(保民)은 국가-전제군주와 그의 관료-의 필수 덕목이었다. 향유하는 모든 재화가 백성들의 근로에서 나온다면, 백성들의 생업을 보호하는 것만이 이익을 보장받는 길이 될 것이다. 양자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왕과 관료 사이의 길항(拮抗)도 재화의 생산과 분배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권력의 향배와 국가(왕조)의 운명이 백성들에 의해 좌우된 것이다. 재화의 생산이 원활하지 않거나 분배 정의가 실현되지 않을 때, 특히 백성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누군가가 가져갈 때 그 국가(왕조)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고대에는 공(公)과 사(私)의 분별이 지나칠 정도로 강조됐다. 그것은 왕(왕조)의 입장에서 더 절실했다. 왕조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용한’ 관료들이 탐욕에 젖어 백성들의 몫을 가져가면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왕(왕조)이 입게 된다. 관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백성들이 생산을 많이 해야 자기들도 가져갈 몫이 생기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생업은 관료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왕조의 관계자들은 백성들의 생업을 보호하기 위해 (실은 자신들의 이익 추구를 위해) 관료들의 가렴주구를 엄격하게 규제하고 통제했다. 왕이 된 자가 그 역할을 수행하지 않을 경우 서슴없이 왕을 교체(革命)했다.

제정 지출을 줄이고(節用) 때에 맞게 공역을 징발한 것(使民而時)은 절차적 정의를 준수할 때(敬事) 지켜진다. 백성들의 생업이 안정되고 민심이 하나로 모아지면 가사 적이 침입한다 해도 나라(왕조)가 멸망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공문의 제자들은 수학을 마친 뒤 대부분 제후의 경사(卿士)나 대부의 가재(家宰) 또는 읍재(邑宰) 등으로 출사했다. 아마 공문의 커리큘럼에는 국가의 경영 철학이나 정치에 임하는 자들이 익혀야 할 정치·행정에 관한 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었을 것이다. 억측이지만 공자 생전에는 위의 3가지 항목이 동시에 강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논어를 편집할 무렵에 하나의 장으로 묶여졌을 것이다.

<이 강좌는 홍성문화원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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