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딸기 향 가득 퍼지는 화전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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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딸기 향 가득 퍼지는 화전마을
  • 김옥선 기자
  • 승인 2019.03.01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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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일구는 색깔있는 농촌마을 사람들

농촌마을 희망스토리-금마면 화양리 화전마을
마을회관에 모인 마을주민들.
금마면 화양리 화전마을 전경.

금마면 화양리 화전마을은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명당이 있는 마을이라 해서 화전이라 부른다. 화전마을은 세 개 반으로 나누는데 1반 벌미굴 혹은 통안, 2반 증말, 3반 소눈골로 불린다. 통안이라는 지명은 마을의 형태가 통처럼 우묵하게 들어간 곳에 위치해 있다는데서 유래됐다. 증말은 가운데에 위치해 있는 중심마을이라는 데서 유래됐고, 소눈골은 소가 누워있는 와우현의 형국이라 부르게 됐다. 주민들은 소롱골이라 부른다.

또한 왜목가리라고 부르는 지명이 있는데 ‘왜’라 부르는 물레방아가 있어 그렇게 부른다. 1970년대 초반까지 물레방아를 사용했는데 개인 소유였지만 주민들이 방아를 찧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도구였다. 물레방아 뒤에 왜통보가 있어 그 보의 물을 이용해 물레방아를 돌렸다.
화전마을 뒤에는 비교적 높은 산인 북망산이 있다. 북망산은 공동묘지로 활용되는데 1990년대 중반경에 묘소를 이전했다. 마을 서쪽으로는 삽교천이 흐르고 있으며 주변에 100m이하의 낮은 구릉이 분포하고 있어 선사시대 유적이 입지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화전마을에서 가장 오래 거주한 성씨는 해주오씨로 4대째 거주했으나 지금은 여러 성씨가 모여 사는 각성바지 마을이다. 화전마을은 음력 정월 초에 길일을 택해 산신제를 지냈다. 통안마을 뒷산 꼭대기에 당집이 지어져 있었다. 1970년대 중반 경 산신제를 지내지 않게 되면서 당집도 사라졌다. 화전마을에는 유명한 샘이 있는데 마을사람들이 유일하게 사용하던 샘이었다. 그런데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면서 물이 줄어들고 하루에도 몇 번씩 물색깔이 바뀌었다. 그 바람에 식수가 부족해 마을주민들이 큰 고생을 겪었다. 1945년 8월 15일 갑자기 샘의 물이 철철 흘러넘쳤다. 그 날 정오경 해방이 됐다는 소식에 샘이 길흉을 점쳐주는 샘으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농수가 넉넉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지하수를 품어야 물을 댈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마을 앞 논에서 사금을 캐면서 여기저기 물 둠벙이 파여 있었다. 둠벙에는 메기, 가물치, 뱀장어, 붕어 등의 물고기가 많았다. 주로 주낙을 이용해 고기를 잡았는데 여름에는 삽교천에 나가 풍채로 잡기도 했다. 마을 앞 삽교천을 건너려면 나루를 이용해야 했다. 마을 앞에는 나루터가 없어 노은리 앞들에서 용두리로 건너가는 나루를 주로 이용했다. 마을 북쪽 화양천변에는 물레방앗간이 있어 마을의 벼 도정공장이 있었으나 지금은 도로 부지로 편입됐다.  
 

화양작목반 한병희, 안경애 씨 부부.

마을의 주요 소득원은 벼농사이며 1990년대 중반부터 화양작목반이 구성돼 딸기로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 화양작목반 한병희, 안경애 씨 부부는 “작목반에 총 14가구가 함께 딸기를 재배하고 있다”며 “생산되는 딸기는 전부 가락시장으로 출하하고 있으며 연 8~9억 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고 말한다. 

화전마을 총 가구 수는 85가구로 그 중 여성가구의 비율이 높으며, 마을주민들은 주로 홍성장을 이용한다. 평촌마을에서 12년 동안 이장직을 맡아 보던 서기석 이장은 화전마을로 이사를 온 뒤 2010년부터 이장직을 맡고 있다. 서기석 이장은 “이장이 부지런히 일하면 주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은 혜택이 돌아오는 법”이라며 마을 대소사에 부지런히 뛰어다니고 있다.

서기석 이장(왼쪽). 홍성에 나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길을 나서는 마을주민.
1970년대 마을모습 (서기석 이장 제공).
1970년대 마을 경로당 모습 (서기석 이장 제공).
화전마을 표지석(왼쪽). 화전마을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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