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창받지 못한 73명 모두가 독립유공자 인정받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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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창받지 못한 73명 모두가 독립유공자 인정받아야"
  • 이은주 기자
  • 승인 2009.08.13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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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최숙자 금마면 기미 3․1만세운동 독립유족회장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일본 제국주의 식민통치로부터 나라를 되찾은 후 맞이하는 64번째 광복절이다. 결코 그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뼈아픈 역사지만 그나마 망각 속으로 빠져들 뻔 했던 선열들의 애국 혼을 달래주기 위해 노력하는 이가 있어 작은 위안을 얻게 된다. 광복 64돌을 맞아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최숙자 금마면 독립유족회 회장(사진)을 만나보았다.


1919년 4월 1일, 연극공연에 모인 군중이 횃불을 들고 목이 터져라 독립만세를 부르며 금마만세운동은 시작됐다. 일본경찰들이 무자비하게 총을 쏘며 진압에 나서자 다음날 4월 2일 이재만, 민영갑, 최중삼, 김재홍, 조재학, 조한원, 김종석 등 7명은 수십 명과 모의 대동하여 홍성시장의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기습적으로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틀 후, 일경의 검속이 강화되자 사람들은 금마면 죽림리 철마산을 비롯한 부평리 원당산, 송암리 퇴뫼산 등 면내 도처의 명산 정상에서 봉화를 올리고 횃불을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최숙자 회장(금마면 기미 3․1 만세운동 독립유족회)은 "낮에는 모두들 숨어있다 밤이 되면 솜방망이를 만들어 두루마기 속에 감추어 산으로 올라가 휘발유를 뿌려 불을 붙이면 여기저기서 불꽃이 올라와 마치 꽃밭 같았다고 아버님은 회상하시곤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결국, 주모자 7명 외 177명의 애국선열들은 모두 체포되어 보안법위반혐의로 형틀에 묶여 수십대(30대~90대)의 태형을 받는 등 갖은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당시 감옥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옥살이 대신 태형 중에서 최고형인 90대(실형 3개월과 같음)를 때렸다더군요. 매를 맞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까무러치고 가족들에게 연락이 와서 가보면 사람들이 살점이 뜯긴 채 초주검으로 누워있더랍니다. 집으로 데려왔으나 변변히 먹을 것도 치료할 약도 없던 터라 태형을 받고 매 맞아 곪아 터진 살 속에서 구더기와 벌레들이 들끓었대요." 어릴 때 사랑방에서 아버님이 들려주시던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며 최 회장은 몸서리를 쳤다.
 
최 회장은 7명의 주모자 중 고 최중삼 씨의 셋째 딸이다. 고 최중삼 씨는 모진 고문과 옥살이로 고생하다 67년에 작고하였다. 이때 최 회장의 나이 17세 때이다. "아버님은 징역 6월을 판결 받고 복역했습니다. 당시 옥살이를 하는데 사방 8자짜리 방에 30명을 집어넣어 모두가 앉아 있을 수 없어 교대로 앉고 일어서고를 반복하며 지내셨다고 합니다. 또한, 더운 날씨에 좁은 방에 사람들을 가득 채워놓으니 땀띠가 곪아 머리카락이 반이 벗겨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버님은 재판 받는 과정에서 일경들이 만세를 부르지 말라고 하니 '내 나라 위해 내가 만세 부르는데 니들이 뭔데 만세를 부르라 마라 하느냐'라고 강하게 항의하여 결국 1개월 정도 형을 더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83년부터 독립유족회 회장직을 맡아온 최 회장은 만세운동당시 범죄인 명부(수형인 명부)에 오른 184명 모두의 명예회복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매진해왔다. 현재 유족회 회원 184명 중 111명이 독립유공자로 인정 돼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최 회장의 부친 또한, 2001년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이 추서돼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현재 국립묘지에 안장된 금마면의 애국선열들은 모두 32명이다. 모두 최 회장의 끈질긴 집념으로 이루어낸 결과이다. 최 회장은 "좀 더 많은 분들이 대통령 표창이 추서돼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것을 보는 것이 더 바랄게 없는 마지막 소원입니다. 하지만 표창을 추서 받지 못한 73명의 독립유공자들의 후손들은 홍성지역에 거주하지 않고 타지로 떠난 분들이 많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한, 국가보훈처의 심사기준이 3개월의 실형까지만 인정이 되어 태형 30대~60대의 형벌을 받은 유공자들은 심사에서 제외 돼 매 맞은 수위의 단순한 이유로 차등평가를 받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최 회장의 눈물나는 노력에 금마면 애국선열 184명의 영혼을 추모하기 위해 당시 대한노인회 금마면분회 이창익 초대회장은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1984년 11월, 화양리 산 48-6번지 도로변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하지만 장소가 너무도 협소해 184선열의 합동추모제향을 올리기가 어려워 92년 철마산에 공원을 조성한 후 추모비를 이전 봉안하고 93년부터 추모제향을 올리고 있다. 

"지금까지 너무도 많은 도움을 주신 금마면 노인회와 철마산 관리위원회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독립유공자들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홍주신문 제85호(2009년 8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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