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지어 먹을 것 남기고 나눠주는 거니까 요란 떨 거 없어"
며칠 전 강원도 횡성군 주민생활지원과에 70대 노인이 예고 없이 찾아왔다. 이 노인은 또 오셨네요라고 인사하는 직원에게 지역 정미소에 쌀을 맡겨놨으니 어려운 이웃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날 익명의 이 노인이 기탁한 쌀은 시가 840만원 상당의 20kg짜리 백미 200포.
이 노인은 지난 2008년부터 3년째 쌀을 전달해오고 있다. 지난 2008년과 지난해에는 20kg 백미 280포씩을 기탁한 바 있다. 그는 올해 쌀이 줄어든 것이 겸연쩍은 듯 "늙어서 그런지 농사가 예전만 못해. 올해는 수확량이 줄어 이것밖에 못하겠어..."라며 "내 신상에 관해 추측할 수 있는 단 한마디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연말 쌀쌀해지는 날씨 속에 전해진 훈훈한 소식 한토막이다. 그동안 이 노인과 같은 얼굴 없는 기부천사는 우리 주변에 적지 않았다. 지난해 익명의 기부천사는 15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100만원 미만이 많지만 1억원이 넘는 거액을 기부한 경우도 있다. 10대에서부터 70대 등 연령별로 다양하고 농업인을 비롯 직장인, 중소기업인 등 계층도 다양하다. 얼굴을 숨긴 채 행복바이러스를 퍼뜨리는 따뜻한 사람들이다. 이들 외에도 평생 동안 어렵게 살면서 모은 전 재산을 장학금 등으로 쾌척하는 사람들도 많다. 폐지를 주워가며 먹을 거 못 먹고 절약해 모은 거금을 장학금으로 내놓은 할머니, 한평생 김밥을 팔아 모은 전 재산을 대학에 기부한 김밥 할머니 등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대기업 등 부유층들이 가진 돈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모습보다 훨씬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
우리 사회를 훈훈하게 하는 얼굴 없는 기부 천사들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기부문화는 선진국에 비하면 아직도 뒤처진다. 특히 재벌과 사회 지도층들의 기부 참여율은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얼마 전 워렌 버핏(Warren Buffett)과 빌 게이츠(Bill Gates) 등 미국의 억만장자 40명이 자신의 재산 중 절반을 기부하기로 발표했다. 이들의 재산 50%를 합산할 경우 우리 돈으로 175조원에 이른다. 미국의 자선연감에 따르면 2007년 미국 상위 50위 부자들의 기부 총액은 무려 7조원에 육박하고 있다. 정기적으로 기부하는 부자들이 많다. 가진 자들의 도덕적 의무를 의미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의 기부문화는 정기적인 기부보다는 자연재해 등 사회적으로 주목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나 연말연시 등 특정 시기 극빈층에 대한 동정에서 나오는 일회성 기부가 대부분이다. 사회 지도층들은 연말연시나 명절을 맞아 독거노인이나 고아원, 양로원 등을 찾아 선물 보따리나 풀어놓고 기념사진을 찍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한마디로 기부가 자발적이기 보다는 사회적인 지위에 떠밀려 하는 전시성 행사로 여기는 경향이 많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이같이 기부문화가 뒤처진 이유로는 유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문화 환경을 꼽는다. 가문을 중시하는 우리 전통이 재산을 자식들에게 불려주어야 한다는 인식이 아직도 뿌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대기업의 경우도 분식회계 등으로 회계를 조작해 재산을 자식에게 승계시키려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환경 속에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기부문화는 후순위로 밀리게 될 수밖에 없다.
이와 함께 모금단체의 불투명성도 문제다. 종교단체를 비롯해 각종 사회단체들이 난립하고 있고 방송 등 언론기관에서도 모금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부를 하고 싶어도 어디에 하면 자신이 낸 기부금이 어려운 이웃에게 제대로 전달될 것인가 의구심을 갖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직접 어려운 곳을 찾아 기부하기에는 손이 부끄럽고 정보도 부족한 판에 믿고 맡길 모금단체도 없으니 기부 문화가 활성화될 리 없다.
유산 상속 문화와 모금단체 불투명성이 장애요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믿었던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국민성금을 유용하고 방만한 운영으로 비리의 산실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충격을 주고 있다. 보건복지부 감사 결과 모금회가 인사를 비롯해 예산집행, 사업배분 등 모든 분야에서 총체적으로 비리를 저질러 온 것으로 밝혀졌다. 인건비를 제멋대로 인상하고, 단란주점이나 노래방에서 업무용 법인카드를 사용하는가 하면 모금의 배분 사업도 주인 없는 돈인 양 엉터리로 진행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 아닐 수 없다.
1998년 출범한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정부가 인정한 국내 유일의 통합모금기관이다. 국민의 성금을 다루는 기관인 만큼 일반 기관보다 더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받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국민이 만들어 준 사랑의 열매로 단란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직원들의 월급이나 인상해주는 대신 성금 배분에는 소홀히 했다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처사임이 분명하다. 국민들이 모금회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은 당연하다.
이 때문에 연말에 집중됐던 불우이웃돕기 모금이 어려워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미 모금회의 비리 소식이 알려지면서 온정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는 소식이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상징인 '사랑의 온도탑'도 설치하지 못하고 있다. 모금회는 뒤늦게 임원진이 사퇴하고 직원들에 대한 중징계와 함께 사과문을 발표했지만 홈페이지엔 질타하는 누리꾼들이 줄을 잇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연말 모금 시즌에 우리 사회를 달구었던 따뜻한 나눔의 문화가 얼어붙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선다.
연말 온정발길 끊길까 우려...그래도 기부는 계속돼야
정부가 비상대책위를 가동하고 대책을 서두르고 있지만 국민적 배신감을 쉽게 가라앉힐 수는 없다. 우선 모금회는 뼈저린 자성을 통해 거듭나기 위한 노력을 보여야 한다. 인적 쇄신은 물론 국민들에게 낮은 자세로 투명한 성금 집행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정부가 기존의 모금기관과는 다른 복수의 모금회 등을 구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이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지 않는 한 상처받은 국민들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다.
올 연말 모금이 저조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당장 모금회를 통해 도움을 받았던 소외계층의 겨울나기가 걱정이다. 매년 12월과 1월 모금액의 60%이상을 차지했던 전례에 비춰볼 때 연말 모금의 저조는 그동안 지원받았던 수 백 곳의 사회단체와 시설들에게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 정부는 이들에 대한 비상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그리고 하루빨리 모금자의 자격을 엄격히 제한하고 성금은 운용내역을 철저히 감시하는 한편 배분사실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등으로 국민들에게 믿고 기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나마 믿었던 공동모금회의 비리로 배신감을 느꼈더라도 기부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동안 우리의 기부문화는 문화 환경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히 성숙돼 왔다. 이번 일로 그동안 쌓아온 우리 기부문화를 한꺼번에 무너뜨릴 수는 없는 일이다. 일부의 잘못으로 수많은 어려운 이웃들이 고통을 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동안 달구어 놨던 따뜻한 우리의 나눔의 마음이 식어서는 곤란하다. 이번 사건으로 우리의 모금체계가 올바로 자리잡고 기부 문화가 한 단계 더 성숙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