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을 사랑하는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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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을 사랑하는 순례
  • 최교성 세례자 요한 <홍주성지 전담 신부>
  • 승인 2022.01.22 08: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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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낯선 소리나 수다스런 말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장소들이 있다. 언어는 무력해져서 그 순간에 오히려 그 장소에 경건함을 표현하지 못한다. 언어는 하나가 됐던 사람들을 서로 갈라놓는다. 대화는 우리를 풍경으로부터 떼어낸다. 대화는 장소의 정령에 대한 배반인 동시에 사회 규범을 만족시키는 수단이다. 그때 감동은 그 말과 더불어 사라진다. 우주와 합의된 느낌 일체의 경계가 사라지는 듯한 감정은 깊은 내면의 어떤 성스러움과 관련이 있는데, 그 성스러움은 수다스러운 것을 두려워한다.

더할 나위 없이 약한 시간의 꽃병을 깨지 않으려면 입을 다물어야 한다. 걷는 것은 잠시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고 숨을 가다듬고 전신의 감각들을 예리하게 갈고 호기심을 새로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걷는다는 것은 대개 자신을 한곳에 집중하기 위해 돌아가는 것이다. 세상에 모든 것은 반드시 질리게 돼 있다. 그러나 유일하게 질리지 않는 친구가 있다. 친할수록 친근하고 가장 좋아지는 친구다. 바로 고독이다. 홀로 사는 사제의 삶이 결코 녹록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나이가 들수록 그 모든 것이 옷과 같이 내 몸에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설사 교황님이 사제들 결혼을 허락한다 해도 30년을 넘게 혼자 살아온 시간들이 아까워 혼자 살꺼다. 나 역시 독신생활이 나를 괴팍하게 만들었다. 이젠 혼자가 훨씬 편하다. 고독과 머리 둘 곳도 없었던 예수님과 함께 함을 더 느끼게 된다. 침묵이 얼마나 나를 풍요롭게 하는지 모른다. 사회적 가치를 멀리 할수록, 사람들과의 만남을 멀리 할수록 하늘의 소리가 들려온다. 마음의 귀가 열리게 되기 때문이 이리라….

순례는 여느 관광과 다르다. 관광은 그 장소와 역사와 만난다고 할 수 있다. 성지순례는 하루 종일 그곳의 순교자들과의 교감을 나눈다. 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성지 신부님의 강론과 해설사들의 해설을 통해 순교자들이 얼마나 위대한 삶을 살았는지 듣게 된다. 

어떤 이들은 그 땅이 너무 거룩하여 신발을 벗는다. 수많은 앞서간 선배 순례자들의 발자취를 밟고, 그 대열에 나도 함께하는 것이다. 그 길도 원래 거룩했고, 또한 그 거룩한 길에 예수님과 순교자들의 삶을 닮고 싶은 마음을 담아, 앞서 걸었던 선배 순례자들의 발길에 내 발길도 더해져서 더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그 아름다운 지향들 때문에 애시 당초 거룩한 땅이 더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발길이 후배들의 길에 이정표 역할을 해주고 수많은 알 수 없는 앞선 이들의 발길에 나도 한몫하게 되는 기쁨도 생기는 것이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삶들이 후손들의 인생길 위에 이정표 역할이 돼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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