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전 손재형, 일본인 후지즈카 끈질긴 설득 끝 ‘조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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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전 손재형, 일본인 후지즈카 끈질긴 설득 끝 ‘조국’에
  • 글·창원 이영복(한국화가)
  • 승인 2022.12.11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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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다시 ‘세한도’를 들여다본다〈3〉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원소장자가 다시 한국에 돌려주기까지

소전(素筌) 손재형 선생은 ‘세한도’를 찾기까지의 다음과 같은 회고담의 글이 있다.
‘나는 경성제국대학 교수 후지즈카 박사가 ‘세한도’를 소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것을 다시 찾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었다. 그가 양보만 한다면 나의 소장품 중 무엇과도 바꿀 수 있겠고 금액으로 말한다면 부르는 대로 주리라고 작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뜻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한국인 보다도 완당에게 심취해 있는 학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일본이 패망하기 전인 1943년 일본으로 떠나버렸다.

나는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것처럼 앞이 캄캄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이듬해 거금 3000엔을 전대에 차고 일본으로 향했다. 당시는 미국의 B29 폭격기와 잠수함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전쟁 말기였다. 생각하면 그림 한 장 때문에 거금을 차고 연일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지 않을까 두려운 도쿄로 향한 것은 참으로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그러나 나는 도쿄에 도착했다. 후지즈카 박사는 우에노쿠 망한려에 있었다. 나는 근처 여관에 숙소를 정하고 일주일 동안 매일 문안인사를 갔다. 나의 소행을 이상히 여긴 그가 용건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대뜸 ‘세한도’를 돌려주십사 하러 왔다고 말했다. 그가 나를 쏘아 보았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많은 작품들을 송두리째 내놓을 수 있어도 ‘세한도’만은 내내 간직할 것입니다. 이제 전쟁도 막바지에 접어들었고 폭격도 차츰 무차별로 나오니 어서 조선으로 돌아 가시오” 

그는 단번에 거절했다. 그가 ‘세한도’를 양보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폭격도 아랑곳 않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문안만 되풀이했다. 90일이 다 되어가던 어느 날, 그의 아들을 불러 나와 나란히 앉히고 말했다.

“내가 죽거든 손재형 선생께 ‘세한도’를 내어드리라.” 

그것으로 나는 후지즈카가 죽은 후, ‘세한도’가 돌아온다는 희망을 갖기는 했다. 그러나 죽는 날까지 기다린다는 것이 막연했고 서로는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더욱 치열해지는 폭격을 피해 산속으로 피난을 가겠다고 했다. 피난처까지 따라갈 수는 없는 일, 나는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허전한 마음으로 작별의 뜻을 전화로 알렸다. 헌데 사정이 달라졌다.

“소전, 내가 졌소. 지금 곧 오시오” 하지 않겠는가. 나는 단숨에 뛰어갔다. 그러자 비단으로 싼 ‘세한도’를 몇 대 독자를 출정 보내는 비통한 얼굴로 내놓았다. 나는 감격하여 3000엔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내가 ‘세한도’를 다시 조선으로 보내는 것은, 첫째 소전이 조선의 문화재를 사랑하는 성심에 감탄한 것이며, 둘째로 그대라면 이 작품을 귀하게 오래 간직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요. 내가 돈을 받고 ‘세한도’를 내놓는다면 지하의 완당 선생이 나를 뭘로 치부하겠소? 더구나 우리는 그분을 사숙하는 동문 아닙니까?”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뭔가 답례를 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곧 청부업자를 시켜 그 댁 정원에 콘크리트 지하실을 짓고 그의 망한려에 있는 수많은 소장품을 옮겨주고 귀국하는 길에 천하를 품에 안은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고 술회하였다. -소설가 곽의진 님의 ‘향 따라 여백 찾아가는 길에서’ 발췌- 

‘세한도’가 돌아온 후 후지즈카 집은 미군의 폭격으로 소실 되고 그가 소장했던 추사 김정희 연구에 관한 수많은 자료들도 대부분 타버렸다고 하니 ‘세한도’는 그야말로 기적같이 화를 피하게 되었다.
 

■‘세한도’가 우리에게 왜 감동을 주는가?
고문헌 연구가 박철상 씨가 펴낸 ‘세한도’글에 의하면 ‘세한도’를 가지고 돌아온 소전 손재형 선생은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있다가 몇 년이 지난 1949년 9월 오세창 선생을 찾아가 펼쳐 보여주니 감개하여 ‘세한도’를 다시 보게 된 감회를 쓴 글에서, “포탄이 비 오듯 떨어지는 속에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겨우 돌아오게 되었다. 아! 자신의 목숨보다 나라의 보물을 더 아끼는 마음을 가진 지사가 아니라면, 어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잘했구나, 잘했어! 그런데 이 사실을 감추고 말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한지가 5~6년이 되었다. 올 9월에 손 군이 갑자기 이 그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보여주었다. 서로 펼쳐놓고 읽으며 어루만졌는데, 마치 죽은 친구를 일으켜 세워 악수하는 듯하여 기쁨과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에 몇 달을 감상하다가 이렇게 그 전말을 기록하고 시를 한 수 쓴다.

“완당 노인 그림 한 장 그 명성 자자 터니
북경으로 동경으로 이리저리 방랑했네
일백년 인생살이 참으로 꿈만 같네
기쁨인가? 슬픔인가? 얻었는가? 잃었는가?”

대한이 이틀 지나서 12월 5일 위창 86세 노인 오세창은 발문을 쓴다. 발문은 16인의 청나라 문인들이 남긴 제영뒤 쪽에 오세창(吳世昌)선생을 비롯해 정인보(鄭寅普)선생, 이시영(李始榮)선생의 감격한 발문(跋文)이 이어져 있다.

‘세한도’가 우리에게 왜 감동을 주는가?에 대한 네 번째 생각은 “자신의 목숨보다 나라의 보물을 더 아끼는 마음을 가진 지사가 아니라면, 어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겠는가? 라고, ‘세한도’가 환국하여 다시 보게 된 오세창 선생의 감격의 전말 글과 제영시를 발문에 기록한 바와 같이 소전 손재형 선생은 청사에 길이 남길 감동적인 큰 업적을 남겼다고, 많은 사람들은 공감하고 있다. 도쿄에서 구사일생으로 화를 피해 돌아온 ‘세한도’는 오랫동안 궁금하였으나 근래(2010년) 소장하고 있던 손창근 님으로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되어 영구한 자리에 있게 되었으니, 누구나 모두가 감사와 기쁨을 함께 하게 되었다. 연하여 연제에 따른 소나무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쓴다.’

‘세한도’를 보면 맨 먼저 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노송과 젊은 소나무, 잣나무 두 그루다. 이 나무 네 그루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이 세상의 매운 인심, 억울함, 옛 사람과의 고마운 정, 의리, 선비의 굳센 의지와 기개, 허망함, 희망, 서광 등 인생의 모든 것을 내재하고 있는 화의(畫意)에 앞서 소나무를 많이 그려온 나로서는 보이는 나무들의 형상을 운필한 필선에서 시선이 떨어지지않는다.

가는 선이 있는가 하면 굵은 선이, 직선이 있으면 곡선이, 둔한 선이 있는가 하면 예리한 선이 있고, 약한 선이 있으면 강한 선이, 느리게 친 선이 있으며 빠르게 친 선이 있다. 간결하지만 나무를 구별하여 친 필선, 노송수피의 신묘한 묵필선 등 문인화를 비롯한 동양회화의 중요 요건인, 선의 조화가 ‘세한도’에 다 들어 있다. 전해 오는 옛말에 서예를 하는 사람은 소나무 가지의 선을 보고 필세를 세우고, 훌륭한 검객이 되려면 소나무를 보고 운검하는 법을 배우라고 하였으니, 의미 있는 말이다.

화업 50여 년에 소나무 그림 그리기 40여 년 하다 보니, 나름대로 크게 깨달아 자득하게 된 것 몇 가지 중에 가장 어려운 것 하나를 들면, 소나무 그림에 있어 가지와 솔잎을 잘 그리고, 나무수형 포치를 잘했다 하더라도, 소나무 그림의 우열을 가늠하는 관건은 둥치(몸체) 표현이 좌우하는데 그것은 몸체와 수피 필선의 조화에 있다는 것, 특히 노송은 수피의 필선에 의해 높은 격의 운치와 신운이 감돌게 된다. 수피는 수령과 환경에 따라 수형과 수세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에 맞는 운필이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작화할 시 그때그때 감흥에 따라 무의식에도 자유자재한 운필선이 이루어져 기운생동이 형성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경우도 있겠으나, 다만 자기에게 냉혹할 정도의 끊임없는 숙련에 의할 일이다. 천재라고도 하고, 수많은 책을 두루 섭렵하여 폭넓은 학문과 식견을 가진 추사 김정희! “평생 먹을 갈아 일천 자루의 붓이 몽당되었다”라고 술회하였으니 노력도 대단했다.

그러나 더하여 어려움이 있으니 “서화는 그 사람 됨됨이만큼 된다”는 말이 있다. 이는 숙련이 능수능란하여 달관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해도 기술자적 붓질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인격수양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대 많은 미술사가들이 위대한 화론가로 동양 산수화의 시조라고 일컫는 형호(荊浩 唐末五代)는 그의 유명한 화론 필법기(筆法記)에 “위대한 예술가의 성공은 천부적인 기질과 후천적인 수양에 달려있다.”라고 기술하였다. 이 형호의 ‘필법기’는 과거는 물론, 현재와 앞으로도 영구히 그 범주에서 연구 발전할 화론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술사가 고 김종태 교수는 그의 저서 ‘동양화론’에 “동양화의 창작예술의 영역은 예술정신과 기교가 서로 배합되어야 완전한 미의 문턱을 넘을 수 있다”고 피력하였다. 이 모두가 동양회화 정신사상의 논리로 비단 서화예술 세계에만 해당될 말이 아니라, 인간만사에 적용될 철리(哲理)라 하여도 무방할 것이나, 숙련과 인격수양 이라는 것, 어찌 말대로 쉬운 일인가 다만 생활 속에서 마음부터 되도록 편안한 마음으로 다스려 힘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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