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를 통해 본 우리의 불편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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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를 통해 본 우리의 불편한 모습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4.07.18 13:19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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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나 사회는 큰 위기를 겪은 후에 그 이전과 달라지기 마련이다. 변화를 거부하거나 잘못된 결정으로 현실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할 경우 생존에 큰 위협을 느끼기 때문이다. 개인이나 기업뿐 아니라 국가도 위기를 기회로 바꾸지 못했을 경우 역사 속으로 사라졌음을 멀지 않은 과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회는 불확실성에서 나오며 조직의 지도자들이 불확실함을 꿰뚫어보는 남다른 통찰력을 보여 주었을 때 조직은 더욱 융성·발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사회는 사회지도자들에게 그런 기대를 걸고 있지 않는 듯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는 해양 분야 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현재와는 확 달라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이가?’, ‘끼리끼리’의 패거리 의식은 사회지도층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켜 왔다. ‘관피아’, ‘해피아’같은 신조어가 만들어진 것도 우리 사회의 지금과 같은 끼리 끼리의 ‘검은 고리 시스템’으로 행복한 사회 건설이 불가능하리라는 성찰에서다.

우리 사회가 과거보다 더 행복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지난날을 반면교사로 삼아 과거부터 지속해왔던 잘못된 관행들을 버리거나 중단해야 한다. 특히 개인과 집단의 불공정한 이익을 위하여 타인의 고통을 요구하는 불법과 탈법의 관행들을 법의 엄정함을 통해 일소해야 한다. 초등학교 사회과목에나 나올 법한 이 기초적 도덕개념이 잘 지켜지지 않는 나라는 행복하고 안전한 나라가 되기 어렵다. 타인의 눈물이 나의 행복이 되고, 자고나면 대형 사고들이 펑펑 터져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사회는 성숙한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성숙한 사회는 나보다 이웃을 배려하는 관용 사회다. 나의 이익을 위하여 규정을 속이고 사회공동체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의 부족에서 출발한다. 백화점이 붕괴되고, 다리가 무너지고, 대형 여객선이 침몰하고, 체육관이 무너지는 것은 근본적으로 기존의 규정을 어기고 누군가 사익을 챙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익의 챙김에는 늘 연결고리가 상존한다. 이 사익의 먹이사슬은 곰팡이처럼 곳곳에 피어 있어 제거되기도 쉽지 않다. 먹이사슬에 참여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고, 이에 관여하지 않은 불특정 다수는 한 순간 날벼락으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이런 불공정하고, 위험한 사회의 도래를 막아내는 길은 엄정한 법 집행과 높은 도덕성을 통해 비행(卑行)을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드는 일이다. 법은 공정할 때 더욱 그 위력을 발휘한다.

개인의 인격처럼 그 사회의 품격을 높이는 일은 사회의 도덕성에 달려 있다. 16세기 영국의 토마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에 나오는 유토피아 사람들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재산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으며, 좋은 옷을 입고 금붙이로 몸을 치장하는 것을 가난한 사람에 대한 우월함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곳에서 요란한 치장은 자신이 하인임을 드러낼 때 다는 표지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한 자신의 타고난 혈통을 자랑하지 않는다. 놀고먹는 귀족이 공동체 사회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모어가 이렇게 유토피아라는 나라의 특성을 설명하는 것은 영국이라는 나라가 아직 유토피아와 거리가 먼 행태를 보이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다. 특히 유토피아에서 사유재산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그 당시 산업발전을 통해 돈 중심 사회로 변해가고 있는 영국사회에 대한 안타까움의 역설이라 할 수 있다. 돈 중심 사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 지를 총명한 모어는 이미 간파하고 있는 듯하다. 헨리 VIII세의 이혼문제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에 있었던 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개인의 인권을 억압하려 했던 왕에게 목숨으로 대항했던 그의 기개와 당당함은 그 시대의 품격으로 자리 잡고 있다.

모어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누구나 꿈꾸어 볼 수 있는 이상향인 ‘유토피아’를 소설로 그려본 것은 당대의 영국 사회가 살만한 곳으로 변화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였다. 그때의 영국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나라의 국가시스템의 변혁도 새로움을 창조해 내려는 도전정신을 통해 가능하다. 기득권의 저항을 이겨내며 우리사회 구석구석에 쌓여 있는 적폐(積弊)를 일소하고 새로운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 이상향이 누구에게나 행복감을 줄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될 때 가능하다. 나도 잘 살 수 있다는 유토피아가 그려질 때 그 사회는 희망으로 활력이 넘치기 때문이다. 나쁜 정치는 잘살 수 있으리라는 꿈마저 포기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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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혜 2015-02-08 09:22:32
감사합니다.

홍민정 2014-07-29 22:33:16
나의 불편한 모습을 많이 봅니다.
사회적인 아품에 너무도 일관적인 뉴스 아침 눈 뜨자 마자 부터 시작되는 그 가족들 이야기에 피로감을 느끼고 듣고 싶지도 뭐라 판단하고 싶지도 않는 나의 불편한 모습
잘 살수 있다는 희망을 내 아이들에게 심어주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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