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총리의 등장과 낙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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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총리의 등장과 낙마
  • 손규성(언론인·칼럼위원)
  • 승인 2015.07.20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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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이해득실이나 지역적 관련성을 떠나 이완구 국무총리의 낙마는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특정지역의 정권재창출을 쉽게 하기 위해 대망론을 키워온 충청인의 정·관·재계의 네트워크를 붕괴시킨 음모론에 동조해서가 아니다. 퇴역한 권력과 살아있는 권력의 힘겨루기에 선봉장으로 나섰다가 저격당한 희생양이라는 동정론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다. 순전히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할 만한 ‘역사총리(歷史總理)’의 등장이 사라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동안 우리에게 총리는 ‘카게무샤(影武者·영무자)-그림자 무사’였다. 대통령제 아래의 총리는 직책상이나, 정치적으로 한계를 갖고 있지만, 있는 듯 없는 듯 권한 없는 그림자 권력으로 보였다. 임면권자인 대통령이라는 최고 권력이 있어 이를 넘어서도 안 되고,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총리의 의중이 담긴 메시지는 나오지 않고, 설사 나온다 해도 상식적이고 의례적인 수사만이 담겨있을 뿐이었다. 이른바 ‘대독총리(代讀總理)’만이 기억에 온전히 남아있는 까닭이 그러하다.

하지만 이 전 총리는 그동안의 관례와 예상을 깼다. 자신의 목소리로 강렬한 메시지를 토해냈다. 그는 지난 4월 9일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일본의 고대사 왜곡과 도발을 ‘지록위마(指鹿爲馬)’라고 성토했다. 일본이 고대 3국 시대에 가야국을 중심으로 신라, 백제국 일부 지역를 통치 경영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에 대해 일방적 주장을 넘어 중학교 교과서에 이를 버젓이 싣게 하는 기록화 작업을 승인한데 따른 것이다. 대독총리가 아닌 ‘일국의 총리’이며 역사총리로서 첫발을 내디딘 장면이었다.

임나일본부설은 일제가 조선을 강제로 병합하면서 식민화 작업을 합리화하기 위해 조작한 대표적인 식민사관의 하나이다. 일본 야마토정권이 4세기 후반 한반도 남부 지역에 진출, 가야에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고 지배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제의 조선지배가 역사적 사실과 맥락이 닿아있다고 조선백성들에게 세뇌시켰던 논리이다. 물론 지금은 일본 역사학계에서 사라진 이론이고 이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거의 없다. 2010년 3월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서 사실이 아니며, 용어 자체를 폐기하기로 합의까지 했다.

우리가 이웃나라와의 과거 역사문제에 민감한 것은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기 위함이다. 애써 유명 역사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는다 해도,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 현재는 미래의 오늘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역사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평가하지 않으면 미래는 영원히 꼬이게 돼있다.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과거사의 문제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사실 확인을 거의 해오지 않은 게 또한 우리의 현실이었다.

일본의 아베 총리가 ‘서구에 빼앗긴 부를 한국을 침략해 토지에서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의 창시자 요시다 쇼인의 사당을 참배하고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추켜올렸을 때 이의 잘못을 지적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가 또 침략의 원흉 이또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대한독립단 참모장 자격으로 저격한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폄하하고 범죄인 취급했을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의 꽃다운 여성들을 강제로 끌고 가 성노예로 삼은 국가적 범죄인 위안부 문제를 ‘인신매매’로 왜곡시키는 아베의 역사관을 제대로 지적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정무차관은 “정치지도자가 과거의 적을 비난해 값싼 박수를 얻기란 어렵지 않다”며 “이 같은 도발은 진전이 아니라 마비를 초래한다”고 비판하며, 한·중·일 과거사 갈등에 대해 공동책임론을 들고 나오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런 때 이 전 총리가 일본의 역사왜곡에 일침을 가하고 나서, 모처럼 울분에 쌓였던 역사바로세우기에 대한 우리의 갈증을 풀어줬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역사총리가 출현했다고 보았지만, 단발에 그쳐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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