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25건) 리스트형 웹진형 타일형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친구 효신이를 처음 만난 것은 유학시절 어느 강의실에서였다. 수업이 몇 주 가량 진행되었음에도 우리가 서로 눈만 마주쳤지 이렇다 할 대화가 없었던 이유는 짙은 눈썹과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그를 나는 ‘집 깨나 사는 동남아 출신 학생’이라고 단정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그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마당쇠처럼 묶고 다녔던 나를 일본 학생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상대가 록음악에 심취해 있을 것이라는 확신과 같은 듯 다른 애매한 피부색이 서로를 경계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수업 내용 중 일부를 이해하지 못한 나는 그에게 영어로 물어봤고 그는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몇 번의 영어 대화가 오고간 후, 우리가 오천년 역사를 가진 한민족이란 것을 알고 한참을 웃었다. 중학생 시절, 가족이 미국 감성노트 | 윤여문<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2016-12-16 10:42 우리가 꿈꾸는 것들 우리가 꿈꾸는 것들 최근에 아들은 더 어른스러워졌다. 몸무게와 키는 벌써 나를 추월했고, 여드름투성이 얼굴과 변성기를 지난 중저음의 목소리는 정확히 어른의 그것이다. 제법 시커멓게 굵어진 아들의 수염을 보고 화장실로 불렀다. 새 면도기를 건네주면서 “아빠 하는 것 잘 봐” 나는 수건에 뜨거운 물을 적셔 수염을 덮었다. 턱과 코 밑 피부가 발그랗다. 비누로 거품을 한껏 만들어 면도할 부분에 정성스레 묻힌 후, “여기서부터 위쪽으로 천천히 긁어 올라가는거야.”면도 시범을 보이고 있는 나를 아들은 뚫어져라 쳐다본다. 두꺼운 수염이 잘리면서 ‘사각사각’ 은밀하면서도 말끔한 소리를 낸다. “자, 이제 아빠처럼 해 봐” 아들은 날카로운 면도날에 베일까 걱정하면서도 이제는 어엿한 남자가 되었다는 뿌듯함을 느끼는지 꽤나 진지한 표정이 감성노트 | 윤여문<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2016-11-18 13:43 부산 가는 길 부산 가는 길 연신 잠자리를 뒤척이다 일어나보니 밖은 어느새 부슬비가 내린다. 새벽 네 시 반, 으스스한 몸으로 간단한 짐을 챙겨 기차역으로 출발했다. 부산 소재 대학교에서 오전 실기 심사가 예정되어 있으므로 여섯시 첫차를 놓치면 낭패가 틀림없다. 다소 일찍 역사(驛舍)에 도착했을 즈음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도시는 아직도 잠에 취해 있지만 부지런한 사람들은 이른 출근에 발길이 바쁘다. 나는 우산을 쓰고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웠다. 정확한 시간에 기차는 출발했고 사위(四圍)는 여전히 어둡다.부산행 기차 여행은 항상 마음을 설레게 한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방학을 이용하여 자주 여행을 다녔다. 당시에는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비둘기호가 있었는데 자정 넘어 막차를 타면 동 트기 전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큼지 감성노트 | 윤여문<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2016-11-07 11:33 꽃이 떨어져 별이 되다 꽃이 떨어져 별이 되다 늦둥이인 나에게는 네 명의 누이가 있다. 53년생 큰 누이와 나이 차이는 21살이고 제일 막내 누이와는 6살 차이다. 재미난 것은 어린 시절 앞집에 살았던 친구 방선배의 어머니와 우리 큰 누이가 동갑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이렇게 나이 차이가 많은 네 명의 누이를 갖는다는 것은 네 명의 인자한 어머니를 갖는 것과 같은 엄청난 행운이고 항상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누이들이 나를 키워주었으니 내 유년시절의 추억 대부분은 그녀들과 연관된다.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녔던 셋째 누이는 주말마다 집에 내려왔다. 어린 내가 주말을 기다렸던 이유 중 절반은 누이와 함께 며칠을 지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일주일 만에 만난 누이에게 껌딱지처럼 딱 붙어 별로 대수롭지 않은 지난 한 주의 일을 가지고 계집아이처 감성노트 | 윤여문<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2016-09-30 11:43 병신 같은 어른들 병신 같은 어른들 우리대학은 여름방학마다 고등학생 대상의 ‘방송예술캠프’를 개최한다. 대학 진로를 선택하지 못한 어린 학생들이 평소 관심 있는 예술에 대해 잠시나마 맛 볼 수 있는 유익한 프로그램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캠프가 개설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방문한 학생들로 캠프는 성황리에 마무리 되었다. 사흘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예술을 배우면 얼마나 배우겠냐마는 대부분의 지원자 학생들은 만족하며 돌아간다. 집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 낯설어하다가도 마지막 날에는 어느새 헤어짐을 아쉬워한다. 매년 반복되는 패턴이다.올해 이 캠프가 나에게 특별했던 이유는 수료식 중에 일어났다. 계열별로 학생들에게 상장을 수여하고자 사회자가 학생을 호명했다. “뮤지컬 전공 우수상 수상자는 단원고 김oo학생입니다.” 단상 맨 앞에 앉아 각 학과 수상 감성노트 | 윤여문<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2016-08-26 11:07 ‘여보’라는 이름의 로봇청소기 ‘여보’라는 이름의 로봇청소기 한 번 상상해 보라. 일주일 내내 과중한 업무와 잦은 술자리에 시달리다가 모처럼 맞이하는 한적한 주말, 아주 편한 옷차림으로 거실 소파에 누워 책을 읽거나 TV 바둑 채널을 본다.요즘처럼 햇살이 좋은 오후, 다소 덥지 않나 싶으면 열어놓은 창문으로 시원한 산들 바람이 스며들어 머리카락을 기분 좋게 건드린다. 출출한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아내는 주방에서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자신의 필살기인 맛있는 잔치국수를 만들고 있고, 아이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각자의 방에서 얌전히 독서를 하고 있다. 문득, 문자 알림 소리에 휴대폰을 열어보니 생각지도 않았던 천만 원이 입금되어 있고, 오랜 지병으로 고생하는 부모님으로부터 지난 정밀 검사에서 모든 병이 감쪽같이 완치되었다는 전화를 받는다. 정말 환상적인 주말 감성노트 | 윤여문<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2016-08-04 16:47 안드레의 고민 안드레의 고민 “모두 일어나 창 밖 던킨도너츠 방향을 봐라” 보스턴의 햇살이 좋았던 10월 어느 날이었다. 재즈화성 수업이 끝날 무렵 교수님의 뜬금없는 지시에 나를 포함한 열댓 명의 학생들은 모조리 강의실 창가로 다가갔다. ‘150’이라고 불리는 버클리음대 메인 빌딩 건너편에 있는 던킨도너츠를 학생들은 모를 수가 없다. 오전 수업 전에 커피를 마시거나, 출출한 오후에 도넛을 먹으며 이른 허기를 달랬던 곳이다. 교수님은 말을 이어갔다. “던킨도너츠 앞 횡단보도를 기준으로 오른쪽 세 번째 나무에 대한 곡을 쓰는 것이 이번 기말 프로젝트다.” 어이없는 주제다. 특정한 악기 몇 개를 지정하여 작곡 프로젝트를 내주는 것이 보통인데, 수많은 가로수 중 하나를 콕 찍어 그것에 대한 곡을 쓰라니. 며칠 동안 그 나무를 둘러보았다. 나무 감성노트 | 윤여문 <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2016-07-07 10:59 열병 같은 추억에서 돌아오다 열병 같은 추억에서 돌아오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아마도 고등학교 2학년쯤이 아니었던가 싶다. 합정동 로터리 부근, 지금은 없어진 파출소 건너편 독서실에서 그녀를 만났다. 당시 나는 독서실에서 밤샘하며 공부한다고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고 그 시간에 전자기타를 구입할 요량으로 편의점에서 야간 점원으로 일했다. 정확히 두 달을 그렇게 일했고 난 꿈에 그리던 중고 전자기타를 가질 수 있었다. 편의점 일을 그만두고 독서실로 다시 돌아온 나는 예전부터 알았던 친구들과 어울리곤 했는데 그 친구들 사이에서 그녀를 만났던 것이다. 그녀는 밝은 얼굴과 쾌활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의 생각이 비슷해서인지 동네 친구들에 비해 비교적 늦게 만났음에도 그녀와 빠르게 친해졌다. 간간히 독서실에서 만나는 사이에서 홍대 카페에서 커피 마시며 몇 감성노트 | 윤여문 <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2016-05-19 11:29 한 세대를 건너뛴 표현 한 세대를 건너뛴 표현 일 년에 서너 번 아버지를 모시고 경기도 북부에 있는 선산에 다녀온다. 자유로를 타고 파주를 지나 잘 닦여진 몇 개의 국도를 따라가면 한 시간 안팎으로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수십 번 다녀온 길이니 이제는 내비게이션 도움 없이도 어렵지 않게 찾아 갈 수 있다.아버지는 말을 아끼다 못해 무뚝뚝하다. 요즘처럼 녹음이 푸르른 날에 모처럼 막내아들과 단둘이 나들이 하면서 이런저런 정겨운 대화를 나누면 좋을 텐데, 아버지는 먼저 대화를 이끌지 않으면 도통 말씀이 없다. 운전하는 한 시간 동안 “다음 삼거리에서 좌회전해라”, “돌아가는 길에 점심 먹자” 정도의 말씀만 하니 이따금 아버지와 함께 하는 침묵의 운전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말씀이 없는 만큼 칭찬에도 인색하다. 지금까지 ‘축하한다’, ‘사랑한다’ 감성노트 | 윤여문 <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2016-04-28 14:25 어른과 꼰대의 경계 어른과 꼰대의 경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고기를 먹어야 하는 회식자리에서 나는 어김없이 집게를 들고 기꺼이 고기를 굽는다. 동료 교수들과의 회식에서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교수로 임용된 이유로, 학생들과의 식사자리에서는 강의실을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고자 하는 이유로, 식구들과의 외식에서는 ‘집에서 하던 일을 밖에서까지 할 수 없다’는 아내의 무언의 항의에 내가 직접 고기를 굽는다.사실, 나는 고기를 잘 굽는다. 이글거리는 숯불에 적당량의 고기를 올려 육즙을 손상시키지 않고 노릇노릇하게 고기를 굽는다. 상추와 마늘을 더해 입에 넣으면 딱 알맞을 크기로 고기를 썰고 김치를 불판에 올려 볶음 김치를 만든다. 고기를 굽는 중에도 상대방이 이야기 하는 주제에 정확히 어울리는 추임새를 넣고 고기가 먹기 좋을 만큼 익 감성노트 | 윤여문 <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2016-03-31 13:33 세상의 모든 위대한 아버지들 세상의 모든 위대한 아버지들 유학시절, 여자 친구였던 지금의 아내와 장거리 연애를 했다. 매달 수십만 원씩 청구되는 국제 전화요금은 차치하고, 간혹 별것 아닌 사소한 일로 다투기라도 하면 장거리 연애의 경우 화해 할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얼굴 맞대고 손 한 번 잡으면 별일 없을 일이 전화로는 장황하게 설명해도 오해가 말끔히 해소되지 않아 곤란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방학을 이용하여 한국에 돌아와 프러포즈 했고, 아내는 흔쾌히 승낙했다.신촌에 있는 조용한 한정식 식당에서 아내의 부모님을 처음 만났다. 그날을 위해서 나는 생애 처음으로 양복을 구입했고, 허리춤까지 길렀던 긴 머리를 단정하게 잘랐다. 단 한 번도 입어보지 않았던 양복의 와이셔츠와 넥타이는 갑갑했고, 고등학교 졸업 이후 십년 만에 처음 경험한 짧은 머리는 부자 감성노트 | 윤여문 <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2016-02-04 15:08 내 아들의 7000원 매 학기를 마무리하는 종강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당부하는 사항이 몇 있다. 방학 동안 건강히 잘 쉬고, 부족한 전공 공부를 보충하거나 여행을 다니고, 역사에 남을 열렬한 사랑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을 해서 본인의 용돈을 충당하라는 것이 주요 골자다. 이 중에서 내가 특별히 강조하는 부분은 아르바이트이다. “부모님한테 뜯어낸 돈으로 남자 친구 또는 여자 친구와 데이트하며 밥 먹고 선물을 사주는 것은 대학생으로써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니 대학생쯤 됐다면 본인의 용돈은 알아서 벌어 쓰라”고 당부한다. 그리곤 새 학기가 시작되면 지난 학기말에 일러두었던 사항들을 간단히 확인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여행을 다녀왔고, 학교 연습실에 남아 방학 내내 전공 연습을 했고, 열렬한 사랑을 했고, 또 아르바이트를 했 감성노트 | 윤여문<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2015-12-04 17:06 나는 작은 일에만 분개하고 싶다 시인 김수영의 시에서 인용한 박완서의 유명한 산문집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의 제목처럼 나는 대체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 버릇이 있다. 교통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기 무섭게 뒤에서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리며 출발을 재촉하는 운전자에게 분개하고,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뒤따라 들어오는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고 매몰차게 엘리베이터 문을 닫아버리는 이웃 주민에게 분개한다. 거나하게 취해 주변 손님은 안중에도 없는 취객의 고성에도 분개하고, 번화한 거리에서 어깨가 부딪혔음에도 사과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에게도 나는 분개한다. 배려란 손톱만큼도 없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가. 어디를 가든지 분노를 유발하는 자들 투성이니 세상살이란 어쩌면 매일 상처받으며 분개하는 일의 연속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감성노트 | 윤여문<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2015-11-20 10:02 내 아들의 7000원 내 아들의 7000원 매 학기를 마무리하는 종강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당부하는 사항이 몇 있다. 방학 동안 건강히 잘 쉬고, 부족한 전공 공부를 보충하거나 여행을 다니고, 역사에 남을 열렬한 사랑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을 해서 본인의 용돈을 충당하라는 것이 주요 골자다. 이 중에서 내가 특별히 강조하는 부분은 아르바이트이다. “부모님한테 뜯어낸 돈으로 남자 친구 또는 여자 친구와 데이트하며 밥 먹고 선물을 사주는 것은 대학생으로써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니 대학생쯤 됐다면 본인의 용돈은 알아서 벌어 쓰라”고 당부한다. 그리곤 새 학기가 시작되면 지난 학기말에 일러두었던 사항들을 간단히 확인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여행을 다녀왔고, 학교 연습실에 남아 방학 내내 전공 연습을 했고, 열렬한 사랑을 했고, 또 아르바이트를 했 감성노트 | 윤여문(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2015-11-03 15:26 폭압적 시대를 기억하는 은밀한 단어, 부라자 내가 다녔던 중학교는 서울 마포에 위치한 100년 전통의 명문 사립학교이다. 편도 2차선 도로를 경계로 건너편에는 서강대학교가 있고, 15분 거리에는 이화여자대학교와 연세대학교가 위치해 있다. 1980년대, 그러니까 제5공화국 시절에 이러한 몇 개의 대학교와 맞붙어있는 중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축복을 넘어 행운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3월에 개학하여 한 달여간 새로운 학년에 적응하고 나면 중학생들은 4월의 따뜻한 봄바람과 함께 다소 늘어지기 마련이다. 이 시기에 큰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우리의 서강대학교 형님들과 누님들은 서서히 데모를 시작한다. 인접한 우리 중학교는 그들이 데모를 시작하면 최루탄 냄새에 자율학습은커녕 정규수업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대학생들은 매우 고맙게도 중학교 정규수업이 감성노트 | 윤여문<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2015-06-12 11:48 역마살 역마살 예전부터 생각했던 일이다. ‘불멸의 이순신’ 같은 사극 드라마를 보면 중앙 관군이 급한 전갈을 전하고자 근육질의 말을 타고 정신없이 달려가는 장면이 있다. 불같은 눈빛의 병사는 갑옷이 출렁거려도 여밀 생각을 못하고 이따금씩 “이럇! 이럇!”하며 한 시도 지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숲속의 좁은 길을 달려간다. 그 장면을 바라보는 내 심장도 ‘다그닥, 다그닥’하는 말발굽 소리의 장단에 맞춰 함께 뛴다. 우리의 조선 병사가 어서 목적지에 늦지 않고 도착하여 적의 침략에 만반의 태세를 갖춰 왜군들을 모조리 물리쳐 주기를 바랄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의 생각은 그 이전의 장면에 멈춰진다. 정확히 말하면, 병사의 채찍을 맞는 말에 집중된다. 원래 말이란 동물은 달리기를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던가. “이럇! 이럇!”하 감성노트 | 윤여문 <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2015-04-13 11:53 낡고 오래되었으나 이제는 사라진 것들 낡고 오래되었으나 이제는 사라진 것들 초등학교 3학년 때쯤 이야기다. 6살 차이의 막내 누이는 용돈을 절약했는지 아니면 부모님에게서 요령 있게 뜯어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당시 우리 집의 형편으로는 쉽게 살 수 없었던 새로운 것들을 가끔씩 사오곤 했다. 나이키 운동화처럼 말이다. 어느 늦은 여름 저녁, 누이는 진한 청색의 헝겊 재질에 흰색 나이키 로고가 멋지게 새겨진 운동화를 사왔다. 그 신발을 보자마자 나는 저녁 준비에 여념이 없는 어머니에게 달려가 누이와 똑같은 신발을 사달라고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마음 단단히 먹고 떼를 쓰는 나를 어머니는 당해낼 수 없음을 알았는지 일주일이 채 되기도 전에 나에게도 신발을 사주었다. 지금도 정확히 기억하는 구천팔백 원짜리 나이키 신발이었다. 제일 작은 사이즈였음에도 초등학교 저학년의 나에 감성노트 | 윤여문 <청운대학교 교수·칼럼위원> | 2015-03-05 19:03 불문율 (不文律) 불문율 (不文律) 얼마 전 홍대입구를 걷고 있는 중이었다. 일기예보에선 많은 양의 눈이 내릴 것이라고 했으나 예고와는 다르게 눈 대신 진눈깨비가 제법 내렸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홍대 거리는 궂은 날씨와는 상관없이 온통 사람들로 붐볐다. 약속 시간에 다소 늦을 것 같아 미리 준비한 우산을 쓰고 수많은 사람들을 빠르게 지나치며 발길을 재촉했다. 우산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거대한 빌딩 처마 밑에서 겨울날의 오후에 내리는 진눈깨비가 어서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많은 인파들을 이리저리 비켜가며 약속장소로 향하고 있는 나에게 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우고 진눈깨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걸어가는 중년의 아주머니가 보였다. 휠체어에 앉아있는 백발의 할머니나 그 휠체어를 밀고 있는 늙은 딸이나 당혹스럽게 내리는 겨울날의 진눈깨비에 속수무 감성노트 | 윤여문<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2015-01-05 11:15 중독 시리즈 3 (친구, 그 비광같은 존재들) 중독 시리즈 3 (친구, 그 비광같은 존재들) 고스톱에서 비광(雨光)의 모습은 일단 화려하다. 빨간색 도포를 입은 선비가 시냇가 옆에서 초록 우산을 쓰고 마치 세상의 모든 희로애락을 터득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 그 그림만으로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비한 모습이다. 유일하게 사람의 모습이 들어 있는 비광은 아이러니하게도 여느 강력한 광과는 다르게 3장을 모아도 3점을 만들 수 없는 비련의 주인공이다. 고스톱에서 광대접도 못 받는 이 미운 오리새끼는 심지어 화투 패로 할 수 있는 다른 놀이인 ‘섯다’에서는 아예 그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 그러므로 광임에도 전혀 존재감이 없는 비운의 광이 바로 이 비광인 것이다. 하지만 비광은 자신의 불우한 출신성분과는 반대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비광이 없으면 오광의 완성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상대가 광 3점으로 감성노트 | 윤여문<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2014-11-21 14:32 어머니와 비 어머니와 비 비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은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늦봄, 창호지 너머 들려오는 빗소리에 늦은 아침을 맞이한 그날부터 나는 비를 사랑했다. 앞마당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포옥 덮어쓰고 비몽사몽의 늦잠을 즐기는 맛이 여간 포근한 것이 아니었다. 밤새 이불 속의 따뜻한 온기 속에서 숙면을 취하고 느닷없이 찾아온 행복한 아침을 음미하고 있을 때, 어머니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해가 중천”이라며 늦은 아침의 기상을 재촉한다. 나는 이유 없이 빗소리를 좋아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작은 우산 하나를 들고 정처 없이 동네를 어슬렁거렸다. 굵은 대나무처럼 쏟아지는 비를 우산 하나로 막아내며 동네 어귀를 몇 시간이고 하릴없이 걸어 다녀도 좋았다. 우산을 두들기는 불규칙한 빗소리는 세상의 감성노트 | 홍주일보 | 2014-11-04 10:22 처음처음12다음다음끝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