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번역하는 것은 우비를 입고 샤워를 하는 것과 같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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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번역하는 것은 우비를 입고 샤워를 하는 것과 같다” 〈2〉
  • 윤정용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2.08.11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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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패터슨과 그의 아내 로라는 여러 면에서 차이점을 보인다. 패터슨은 자신이 쓴 시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려 하지 않는 데 반해, 로라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감정 표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는데 반해, 그녀는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패터슨과 로라는 ‘정지’와 ‘역동’이라는 점에 있어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스스로 선택했고, 상대방에게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 유사하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패터슨>의 자무시 감독은 패터슨의 시 쓰기를 통해 ‘시를 왜 쓰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패터슨에게 시 쓰기는 어떤 의미일까?’라는 질문으로 환원될 수도 있다. 패터슨이 시를 쓰는 본질적인 이유는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즉 그는 공명심이나 인정 욕구 때문에 시를 쓰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자기 치유를 위해서 시를 쓰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는 시를 통해 어느 정도 자신을 치유하지만 근원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원래 문학치료에서 쓰는 행위는 작품의 완성도나 탁월성과 무관하게 쓰는 자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한다.

패터슨은 자신이 쓴 시를 완성품의 형태로 세상에 내보내는 일에 열의를 보이지 않는다. 그는 시를 쓰지만 위대한 시인이 되려는 열망이 없다. 또 시를 통해 유명해지겠다는 열망도 없다. 그에게 ‘시 쓰기’는 세상과 대화하는 방식이자 도구이다. 시와 일상, 그에게는 예술과 일상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예술이 곧 일상이고, 일상이 곧 예술이다. 패터슨에게 시는 고독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사람과 장소, 그리고 시간과의 대화의 결과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그의 아내 로라가 외출한 사이 마빈이 그의 시집을 물어뜯어 망가뜨렸을 땡도 그의 반응은 무심하다. 로라가 안타까워하자 그는 “시는 물 위에 쓴 낱말일 뿐이야”라고 말한다. 그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하는 행위이며, 작품의 보존이나 시집의 출간은 시 쓰기의 행위로서의 본질을 온전하게 드러내지 못한다.

패터슨에게 시는 내적으로 완결된 세계이고 시인의 삶을 압축한 소우주이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시인이 될 수 있고, 모든 것들이 시의 소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예컨대 그가 래퍼에게 세탁소가 랩을 만드는 작업실이냐고 묻자 래퍼는 “느낌이 오는 곳이라면 어디든”이라고 답한다. 래퍼에게 느낌이 오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지 랩을 만들 수 있는 장소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시인 또한 마찬가지다. 패터슨은 시간이 날 때마다 시를 생각하고 시를 쓴다.

패터슨은 패터슨을 대표하는 퍼세익강의 폭포 앞에서 매일 점심을 먹고 시를 쓴다. 패터슨은 한때 번창했던 공업도시였고, 섬유와 방적은 도시의 주요 산업이었다. 퍼세익강은 방적 산업에 필수적인 산업용수를 제공했다. 하지만 산업이 쇠퇴하면서 퍼세익강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 퍼세익강은 영화에서 패터슨이 자주 가는 바의 ‘명예의 전당’(wall of fame)에 가깝다. 

패터슨은 반려견 마빈이 자신의 시집을 망가뜨린 후에도 폭포를 찾고 그곳에서 한 일본인을 만난다. 일본인은 위대한 시인들이 각자의 삶 속에서 전혀 시인과 어울리지 않는 생업에 매달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시를 남긴 사례들을 언급한다. 패터슨이 시를 좋아하냐고 묻자 그는 “시로 숨을 쉰다”고 답한다. <계속>

윤정용 <문학평론가·칼럼·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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