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 그릇에 밴 행복의 가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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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한 그릇에 밴 행복의 가늠자
  • 유선자 수필가
  • 승인 2018.03.29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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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건네는 인사말 중에는 “밥 먹었니?”가 있다. 사전에는 ‘먹는다’와 ‘산다’를 합친 말인 ‘먹고 산다’인 한 단어로 적고 있다. 오래전부터 우리는 먹는 것을 곧 사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나는 아침마다 쌀을 얹으면서 솥단지 안에서 우주를 본다. 마치 산골 깊은 곳에서 떠밀려 내려와 먼 시원의 바다로 끌려 다니다 어느 해변에 몸을 풀고 평생 닳아 버린 몽돌의 내장 같은 영롱함을 보는 듯하다.

쌀 한 톨 속에는 벼가 익어 갈 때 함께했던 참새의 노랫소리가 담겨 있는 듯하다. 메뚜기와 여치의 인생사와 넋두리도 담겨 있는 듯하다. 거두와 서리태, 불린 수수를 넣어서 가족의 건강을 빌며 농부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함께 밥을 하는 아침은 작은 행복을 익히는 시간이다.

제 몸이 터지는 것을 알면서도 쌀은 사람의 생명을 위해 몸을 불려 부드러워지는 작업을 숙명처럼 받아들인다. 곡물로 태어나 근(根), 묘(苗), 화(花), 실(實)의 역할을 충실히 함으로 숙명을 다한다. 누군가의 입속으로 들어가서 살이 되고 피가 되기 위해 오직 생명을 다해 곡물로써 산자들에게 생을 연장시켜 주며 순교에 임한다. 

이들 중 얼마는 태양과 파도와 우주의 온갖 소리와 한철 세상의 소식을 바람으로 전해 듣고 가을이 되면 스스로의 결실로 고개 숙이며 빛바래어지며 그냥 익었다. 곡식들은 물과 불의 조화로 부드럽게 익어 입속에서 오물거리며 분쇄되고 잠시 서성이다 목이라는 재를 넘어 창자를 지나는 긴 여행을 떠난다.

밥의 여행으로 인해 우리의 몸에는 필요한 자양분이 생기고 생명의 에너지인 피를 만들고 또 변을 생산한다. 살아가는 통과의례다. 통과의례가 하루라도 멈춘다면 인간은 시들어 갈 것이다. 한 그릇의 밥을 먹을 때마다 나를 위해 생을 희생한 알곡에 대해 자신을 위한 여행이 아닌 지구의 수많은 생명을 위한 순례행위에 대해 무한한 경건함을 표하고 싶다.

예로부터 어른들은 밥을 감사히 잘 먹어야 살이 되고 복이 된다고 했다. 사람들이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식신의 품격(品格)을 알 수 있다. 먹기 위해 사는지, 살기 위해 먹는지 보다 더 중요한 식사의 품성을 말함이다. 한 수저 한 수저 우주의 섭리를 읽어 보듯 밥을 먹어 보자.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건만 허겁지겁 먹는 것보다 여유를 갖고 입 안에서 최대한 오래 씹어 음미하면서 밥을 먹자.

아, 저 사람 참 밥 맛있게 먹는구나!’ 보는 이로 하여금 평온함을 자아내게 먹어보자. 먹고 살기가 팍팍했던 전란의 시대도 아니다. 삶의 넉넉함이 사라질 이유가 작아졌는데도 여전히 급하고 어딘가로 금방 떠나야 할 사람처럼 먹는다는 것은 열심히 살아온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이제 허겁지겁 먹는 일에서 벗어나 서로에게 평화로운 모습을 전해 주면서 눈인사도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행복을 안기는 농심의 시간을 읽으면서 천심을 익혀보자 말하고 싶다.

밥알 하나는 단지 한 끼의 식사를 위한 매개체가 아니라 우리 몸 안에서 자신을 희생하며 새로운 에너지를 일으키는 존재임을 기억하자. 육신을 위해 먹는 밥이 아닌 마음까지 편안해지는 밥을 먹도록 하자. 그런 밥을 먹는다면 영혼까지 부자인 사람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친구와 오랜만에  종로상가 뒷골목을 갔다. 1층으로 된 상가들이 열을 지듯 다닥다닥 늘어서 있다. 그 상가 중 한 곳에서 식사를 마친 뒤 밥상을 내어 놓았다. 그러자 분명 보이지 않았었는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남루한 옷을 걸친 할아버지 한 분이 쏜살같이 달려와서 누가 볼세라 허겁지겁 밥을 두 손으로 먹어치웠다.

누구나 밥은 배불리 먹고 산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누군가에게는 한 그릇의 밥이 하루의 전부였다. 나는 지금 한 알의 알곡이 되어 더불어 살아가는 마음과 몸이 고단한 내 이웃들에게 삶의 동행자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따뜻한 밥을 두 손에 안아 식탁에 올리며 잠시 알곡의 경건한 정신을 살펴본다. 밥 한 그릇이 주는 행복의 가늠자 앞에서 나의 행복을 마주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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