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 꽃 마주하기도 어려운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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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 꽃 마주하기도 어려운 시대
  • 유선자 수필가
  • 승인 2018.07.26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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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宇宙)도 잠 못 들 정도로 와글와글 개구리 기도소리 한참이더니 어느새 인동초 꽃 향이 코끝에서 멀어지고 있다. 아주 오랜만에 목화 꽃을 산사 뒷길에서 마주했다. 연두색 꽃잎이 청정지역에 사는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의 영혼처럼 어찌나 고운지 생각 없이 쳐다보고 쳐다봤다. 유년시절 동네 어귀에 심어져 있던 목화밭을 지나면서 간식거리가 없었던 시절 핑계 삼아 열매를 따 먹었던 기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세월이 어느새 이렇게 후다닥 지나있는지 정말 눈 깜짝 할 사이에 내 어머니 위치에 와 있다. 목화 꽃 하면 역시 나의 어머니가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 엄마는 왜 목화열매 먹는 모습을 보여준 적 없을까 궁금하다.

엄마는 참 고전적이셨다. 누가 봐도 동양적인 행동과 자태셨다. 군림형태의 아버지에 반해 엄마는 얌전함이 지나쳐 복종 형태의 모습으로까지 보였다. 뚜렷한 색깔도 있는 듯 없는 듯 그러면서 늘 아버지 곁에 계신, 창호지를 바른 창문 안에 자식들을 위해 따뜻한 호롱불 빛으로 존재하는 분이셨다. 세상 안에서도 집 안에서도 튀지는 않지만 주위를 편안하게 해 주는 무명천은 엄마와 가장 많이 함께 했다. 엄마가 여자로서의 삶을 살 수 없는 모습을 보고 같은 여자로서 아버지에 대한 피해의식을 딸인 내가 대신 전이 받고 있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기에 엄마의 그 불투명성 색을 싫어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 무명천 색이 그리워졌다. 

튀지도 않고 그렇다고 새 하얗지도 않으니 부담감도 없다. 먼지가 묻어도 긴장하지 않아도 되고 편안함과 함께 목화솜의 숨결을 그대로 전해 받는 느낌이다. 조선의 여인으로 살라는 명도 없었을 터인데 무명천의 색으로 살아가는 뒤안길에서 보면 포기가 아닌 삶의 질곡 속에 살짝 양보한 듯 위안을 준다. 아픔을 베어 문 듯, 먼발치에서의 엷은 베이지 색 느낌이다. 부족한 듯 미완성인 듯, 더 보태어 색칠할 이유도 탈색할 것도 없다. 거기서 거기인 듯 흑백의 논리에서 벗어난 용기의 뒤태를 마주한다. 파스텔 톤의 어중간함을 모두 끌어안고 있는 무명천은 나이든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한철 넉넉히 푸르렀던 들풀이 안식에 들어간 휴식의 색이었다.

무명천의 색은 어느 순간 이해와 용서의 색이었음도 알게 되었다. 본인의 깐깐한 성격을 누르며 살아 올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색이었다. 50년 정도는 지나야 무명천에서 만날 수 있는 누런색이 주는 시간의 무게감에도 초연할 수 있는 아낙의 색이었다. 그리고 안도감, 고요히 불어오는 미풍의 온도에 내어 맡기며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 소리에도 귀 기울이는 자연의 색이었다. 나태함이 아닌 안식을 전해 주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진정한 화사함을 갖고 있었다. 생각나지 않을 것 같지만 문득 더 생각이 나는 인생길 피곤에 지쳐 무기력에 빠져 있을 때 눈물을 가장 많이 닦아 준 손수건 대용이기에 앞서 여인의 울음을 안은 천이었다.

엄마는 결혼할 때 직접 이불을 만들어 주셨다. 한 송이송이 목화솜까지 만들어 내기까지 목화밭 언저리를 홀로 얼마나 많이 왔다 갔다 하셨을까. 무슨 노랫가락을 부르면서 일을 하셨을까. 이렇듯 생각하니 무겁고 큰 이불을 도시생활에 안 맞는다고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불 집에 보내 솜을 틀어 요를 만들어 달라고 하니 요만 아홉 개가 나왔다. 퇴근 후 거실에 가득 요가 쌓여 있는 것을 보고 남편은 놀라서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갑자기 이불 집 딸이 또 시집 왔노라 말하면서 나 또한 웃음이 나왔다. 벌써 세 개는 필요한 사람이 가져갔다. 문익점의 손자 ‘문래’가 나를 보면 얼마나 좋아할 것인가. 목화 꽃이 우리 거실에 가득 피어 있는 듯 그 행복함을 누가 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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