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수, 홍성의 등불이자 한 시대의 저울추였다
상태바
김양수, 홍성의 등불이자 한 시대의 저울추였다
  • 홍주신문
  • 승인 2012.08.20 10: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8일 홍성문화원에서는 홍성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모처럼의 뜻 깊은 이색행사가 열렸다. 홍성의 꼿꼿했던 대표적인 논객으로 지역 여론주도층의 핵심으로 문인이자, 언론인이며, 교육자로 삶을 살았던 고(故) 김양수(金亮洙, 1939~2000) 전 청운대 교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역재방죽 주변에 문학비가 세워졌기 때문이다. 본지는 지난 1963년 한국일보 기자시험에 합격, 홍성지역 최초의 주재기자로 발령받아 1980년 정부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강제 사직된 이후 지역의 언론사와 지역사, 교육사에 길이 빛날 업적을 남기며 홍성의 등불이자 한 시대의 저울추 역할을 했던 김양수 교수의 삶의 열정과 가치를 재조명 해본다. <편집자 주>

△ 청운대 교수 시절의 김양수 교수 모습






내 친구 김양수야, 대답 없는 친구야!


장 석 기 전 한국재생공사 홍성사업소장
2000년 8월 8일 새벽, 하늘빛은 밝음을 먹기 시작하고 있는데 어디선지 청천벽력이 일어나는 듯했다. 아, 불과 61세를 일기로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나의 영원한 친구 김양수는 마주하지도 못한 채 제 홀로 이별을 고해주고는 훌쩍 떠나버렸다. 홍주초등학교에서부터 시작한 동행의 발걸음이 홍성중학교, 홍성고등학교를 거쳐 무려 12년 동안 수많은 발자국을 길거리마다 골목마다 새겨 넣었던 친구가 아닌가.

문득 그가 세상을 굽어보고 있을 하늘을 우러러보며 그가 남긴 큰 발자국을 되새겨 본다. 청운대학교, 혜전대학교 교수로서의 교육자, 신문기자로서의 언론인, 수필가로서의 문학인, 농축산업 지도자로서의 농촌부흥운동가, 홍성신용협동조합과 홍성낙농협동조합의 초석을 다진 경제인으로서의 활약 등 누가 홀로 이러한 큰 족적을 남길 수 있으랴! 그가 남긴 큰 족적이 새겨진 자리마다 이제는 소나기가 지나가기나 한 듯 그리움이 가득 고이다가 흘러넘친다.

성균관대학교를 졸업 후 기자로 사회활동에 발을 디딘 그는 자기 주장을 거침없이 펼친 논객으로 지난 40여년간 지역여론 주도층의 핵심이었다. 1963년 그는 제1기 한국일보 지방주재기자 채용시험에 합격, 홍성지역 최초 주재기자로 발령을 받았다. 이후 기자로서의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1970년부터 1971년에는 대전문화방속국 주재기자직까지 겸하여 그 활동의 폭을 넓혔다. 그리하여 1980년 군부독재의 언론통폐합 정책에 의해 강제 사직될 때까지 한국일보 기자로서 홍성이 충청남도내 서부지역 언론센터로서의 역할을 하는데 견인차가 되어 맹활약을 펼쳤다.

그는 홍성군지 ‘언론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취재로 청양 구봉광산에서 광부 양창선 씨가 14일간 매몰되었다가 구출된 사건, 홍성읍 지진 사건 등을 언급하면서, “충서지역의 사건사고가 전국에 가장 신속하고 정확하게 전달될 때 보람이 컸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만큼 그는 언론이 가지는 사회의 목탁이 되는데 발걸음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움직였다.

1980년 뜻하지 않게 언론통폐합 조치의 희생양이 되면서 지역 언론의 중요성을 몸소 체험한 나의 친구 김양수는 단지 군정홍보지 성격으로 발간되어 오던 홍성문화원 기관지 ‘홍주소식’지를 1987년 5월 주민주도형으로 속간시켜 2000년 8월까지 편집주간을 맡아왔다. 홍주소식지는 현재 홍성문화로 제호가 바뀌었는데, 그는 평소 “정부의 언론탄압에 맞서 지역주민들이 스스로 지역언론의 활성화를 꾀해 본 시도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1988년 전국 최초의 지역신문 ‘주간홍성’의 창간에도 그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홍성군지(1980)’ 제작 및 ‘홍성군지(1990년)’ 증보판 발행에도 편찬, 편집, 집필위원으로 참여해 주도해 나갔다.

지역문화예술 진흥에 대한 열정도 뜨거웠다. 김양수는 1984년 홍주문학회 창립을 주도하고 2~3대 회장을 역임하면서 문인들의 맏형으로서 홍성지방에 문학단체가 뿌리내리는데 기둥 역할을 했다. 그 자신이 평소부터 꿈꾸어 왔으면서도 이 일 저 일로 인하여 차일피일 미루어오던 문학의 길에 찾아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89년 ‘동양문학’ 신인상 수필부문에 당선되어 문단의 문을 열어젖혔다. 충남문인협회,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세상을 하직하기까지 열심히 수필을 써서 발표하였다.

자주적이고 조직적이며 전문적인 협동조합운동을 펼치면서 그는 농촌부흥운동에 앞장섰다. 협동조합운동이야말로 앞으로 농촌의 살길이라고 역설해온 그는 1970년대 후반 홍성신용협동조합을 인수·합병함으로써 오늘날의 홍성신용협동조합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1980년 홍성 최초 젖소를 입식하고 홍성읍 월산리에서 산길목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낙농인 단체인 낙우회 초대회장을 맡았고 전문조합을 만들어야 한다는 지론으로 ‘홍성낙농협동조합’ 창립을 앞장서 이끌었다. 농업후계 세대인 농업경영인회의 고문도 겸하여 젊은 농민들에게 “농촌에 산다고 기죽지 말고 허리 펴고 떳떳하게 살자”면서 농촌 젊은이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도록 하는데 기수가 되기도 하였다.

마지막 열정까지 불살랐던 교육가로서의 삶은, 홍성에 대학이 유치돼야 지역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신조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그는 곧 1981년 학교법인 혜전학원 설립인가에 발 벗고 나섰다. 그리하여 마침내 1982년 학교법인 혜전대학교 개교와 함께 전국 최초로 출판과를 설립하여 후학을 양성하는데 온갖 힘을 다 기울였다. 그 결과 출판계 실무인력을 양성·배출함으로써 지방 출판문화의 혁신적인 발전을 도모하였을 뿐만 아니라 출판문화의 새로운 길을 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대학교에서는 학보사 주간, 교무처장을 역임하면서 대학발전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흔히 그를 가리켜 지방에서는 ‘혜전학원의 마당발’이라 불렀다. 그도 그럴 것이 혜전대학교 뿐만 아니라 현재의 청운대학교 설립에도 대내외적인 실무를 주도해왔다. 그리고 1997년에는 그 스스로 청운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광고홍보학과 교수, 기획홍보처창 등으로 재직하며 혜전학원의 역사에 길이 빛날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홍성사회의 발전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발걸음하면서도 그는 모교 홍성고등학교에도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개교 이래 최초로 ‘홍고50년사’의 편찬 작업에 착수하였다. 1981년 홍성고등학교 50주년 기념 행사를 앞에 두고 시작된 홍고 50년사 편집위원장을 맡아서 성공리에 편찬해 내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60주년 행사를 앞에 두고 기획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중에 지병이 악화되어 2000년 8월 8일 새벽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으니, 이 안타까움을 어찌 다 말 할 수 있으랴.

오, 나의 친구 김양수의 발걸음은 항상 바빴다.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하는가 하면, 앞의 일을 마치고는 곧바로 뒷일에 매진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천성적인 부지런함, 맡은 바 모든 일에 최선의 방법을 다하여 열정을 쏟아 부으며 매진하는 철저한 책임감, 일단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하면 마침내 목적고지에 도달하고야 마는 끈질긴 노력-내 친구 김양수는 철인이 분명했다. 그가 평소에 무슨 일이건 한번 맡으면 최선을 다했다. 때에 따라 올바른 길 위에서 자기의 주장을 거침없이 펼치는 논객이었지만, 한 발 물러나 포근히 감싸주는 따뜻한 인간애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길을 놓치지 않고 뒤 따르게 했다. 넓은 포용력과 아량, 그리고 겸허한 마음의 씀씀이는 인간적인 정이 항상 넘쳐났다.

나의 친구 김양수가 가고 없는 이 홍주. 그가 남긴 수많은 발자국을 따라 밟고 있는 지금도 그는 어느 골목 어느 거리 한 모퉁이에서 불쑥 뛰쳐나와 “석기야!”하고 소리 높여 외쳐줄 것만 같다. “오, 나의 친구 양수야!”-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할 말은 너와 내가 서 있는 이 아득한 거리를 두고 할 수밖에 없는 한 마디라서 더욱 더 그리워지는구나!-삼가 고개 숙여 명복을 빈다!













그리운 친구여

박 상 현 (서예가·홍성고 11회 동기)
아아 김양수 사백(詞伯)이여
홍성을 사랑하고
고향에 터를 잡아
가꿔온 시문들
설계했던 꿈과 이상
펼쳐왔던 고귀한 정신
모든 이의 귀감이었네

그대의 발자취
이룩한 업적
소중하게 담아
이렇게 문학비로
승화시켜 추모하오니

이제 모든 것 내려놓고
마음편히 잠드소서
영면(永眠)하소서













숨 통

이 정 록 (시인, 충남작가회의 회장)
백월산이 빙그레
그와 함께 웃었다

한쪽 발이 출렁일 때마다
그의 젖은 눈망울이
세상의 마른 땅에 적셨다

산자락이 내려와
그의 어깨에
아그배나무 가지를 얹었다
꽃망울이 터지고 있었다

그가 나머지 한 발을
말뚝처럼 딛고 단호하게 버틸 때
그늘진 곳에서도 새잎이 돋았다

그러나, 몰고 지고
그가 조금 일찍 소풍을 떠나자,
꼬끼리바위가 식식 코쭝배기를 치켜 올렸다
산등성이가 마구잡이로 굽이쳤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운 사람들의 고개가 백월 마루에 우러렀다
우러를 때마다 두런두런 숨통이 열렸다












‘눈을 감으면 들려오는 목소리 하나’

신 소 대 (한국문인협회 홍성군지부장)
이 세상 홍성의 아들로 태어나
언론계에서 정론직필(正論直筆) 펼치시더니
우리 고장 축산고장이라는 명성 얻게 하시더니
우리 지역 대학 교수로
향토인 마음 울리는 수필가로
홍성 문학의 산실 홍주문학회 창립하시어
향토문학의 싹 북돋아 주시던 그 열정
이 세상 가신지 십여 년 넘어도
눈을 감으면 들려오는 목소리 하나가
홍성이 가꾼 벌판 위에서 아직 들려오네

한빛에 잠긴 그 목소리 들으러
그리움 안고 밤중에 달려 나가면
목소리는 거기 없고 외로운 그림자만 남아
지금까지 홍성의 벌판을 떠돌고 있네

아직 잊히지 못한 여러 가지
김양수 교수님 기억들은
지상의 모든 방 천정에 매달려
한 빛은 어둠에 안겨
한 어둠은 빛에 안겨 잠들지 못하고
그림자밖에 없는 지난 세월에 쌓여
아직도 이슬 밑에서 제 뼈를 핥았지만
이제야 가신님 지역 사랑의 마음을 모아
홍성의 영원한 아들을 기리는 문학비 남긴 자리
저 건너 산에서 밀려들어오는 환한 꿈 안고
바람은 구름 사이 문 사이로 불고
언제나 가슴에 살아남은 많은 기억
허공에 일어나 모두를 부르네요.



[ 수필가 김양수 시비 제막에 부쳐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