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 출신 독립운동가 이상만 선생 공적비를 제막하며
상태바
홍성 출신 독립운동가 이상만 선생 공적비를 제막하며
  • 고성은 목사 <한국교회인물연구소장, 광리감리교회 담임, 목원대 강사>
  • 승인 2023.07.07 08: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지난 6월 30일 충령사에서 홍성 출신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독립운동가 이상만 선생 공적비 제막식이 이용록 홍수군수, 이선균 홍성군의회 의장, 이종화 충남도의회 의원, 이문용 홍성군기독교연합회장, 함동주 전 홍성군기독교연합회장, 이상만 선생 장손녀인 이경하 씨를 비롯한 이상만 선생 유가족들, 홍성군청 직원들, 보훈단체 관계자들, 홍성군기독교연합회 목회자들과 교인들 등 6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제막식은 김성호 홍성군청 복지팀장의 사회 속에 필자가 한국교회인물연구소장 직함으로 이상만 선생 공적 설명을 한 후 이용록 군수, 이선균 의장, 이종화 도의원, 이문용 회장의 인사 말씀 등으로 이어진 가운데 공적비를 제막하는 순으로 진행했다. 

지난 2019년 9월 홍성군기독교연합회가 주관해 홍성역사인물축제 기간에 필자가 홍성의 숨은 역사 역사인물 발굴을 위한 세미나의 일환으로 독립운동가 이상만 목사의 생애와 활동이라는 제하의 학술 세미나를 개최한 지 4년 만의 일이다. 

필자는 이 학술 세미나를 통해 이상만 목사에 대한 공적비나 추모비를 지역 교회보다는 지역 사회 속에서 건립하는 것을 계획했고, 이 계획을 홍성군기독교연합회에서 연합회 사업으로 받아줬다. 그리하여 2019년 이래 수년동안 홍성군기독교연합회 역대 총무들인 김유천 목사, 최윤종 목사, 현재 총무인 이진곡 목사, 홍성읍기독교연합회 총무를 지낸 정진선 목사 등이 독립운동가 이상만 목사를 홍보하고 공적비가 설립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최대한 지원과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지만 수년동안 이상만 목사 공적비 건립 사업은 답보 상태에 머무르다가 지난해 홍성군기독교연합회에서 주관한 광복절 기념 연합 예배 시 필자가 광천감리교회 장로이자 충남도의회 의원인 이종화 의원에게 이상만 목사 공적비 건립 제안을 간곡하게 요청드렸고, 이에 이종화 의원이 도의원 사업비 가운데 수천만 원을 이상만 목사 공적비 건립 자금으로 내놓으면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 

이를 계기로 홍성군기독교연합회에 이상만 목사 공적비 추진위원회가 결성됐다. 이 위원회는 위원장에 이문용 홍성군기독교연합회 회장, 위원으로는 필자를 비롯해 이진곡 목사, 김유천 목사, 최윤종 목사, 최정일 목사 등 6명으로 구성했다. 위원회를 중심으로 홍성군과 협의한 가운데 이용록 홍성군수께서 용단을 내려 최종적으로 최적지라 할 수 있는 충령사 초입 지역을 이상만 선생 공적비 건립지로 지정해 줬다. 또 접근이 용이하도록 도로 조성도 새롭게 했다. 공적비의 비문 작업은 필자와 홍성군 사이를 오가며 이문용 회장이 다리 역할을 해줬다. 다른 무엇보다 필자가 작성한 공적비 비문은 순한글로 작성해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읽고 알 수 있도록 했다. 

이 공적비의 주인공인 이상만 선생은 1884년 1월 5일 홍성군 홍성읍 고암리 영암마을에서 출생했다. 1905년 북 장로회 민노아(F. S. Miller) 선교사의 홍성 방문 이래 태동한 고암리 기도처를 통해 기독교에 입교했다. 이 신앙공동체는 1909년 선교지 분할 협정을 통해 북 장로회에서 미 감리회로 이관됐는데, 현재 홍성제일감리교회의 모체이다. 

이 신앙공동체 출신인 이상만은 목회자가 되어 자신의 고향에서 목회자로 활동했다. 그가 미 감리회 조선연회 소속의 목회자로 고향에서 1912년부터 1917년까지 목회했을 때 존립했던 신앙공동체로는 현재 홍성제일감리교회를 비롯해 갈산감리교회, 금마감리교회, 광천감리교회, 예산 효교감리교회, 그리고 현존하지 않는 장곡면 신동리 교회 등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는 고향에서 목회했을 때 신령한 목회자로 평가받았는데, 특히 갈산감리교회의 예배당 건축을 이뤄내는 목회 성과를 이뤄내기도 했다. 그는 고향에서 목회하면서 1916년 협성신학교, 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했다. 1917년부터 1919년까지 당진 지역으로 파송받아 목회를 했다.  1918년 미 감리회 제11회 조선연회에서 집사 목사 안수를 받기도 했다. 당진 지역에서 목회하던 시절인 1919년 거족적인 3·1독립운동이 발생했는데, 그 역시 민족적인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 직전에 호서지역에서 3·1독립운동 선전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가 목회한 바 있던 홍성의 갈산감리교회에서 발생한 3·1 독립운동과 면천에서 발생한 면천공립보통학교 3·10 학생 독립운동은 개연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3·1독립운동이 발생한 직후인 1919년 음력 4월에 조국 독립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망명 직후 북경에서 1919년 3월 홍성 출신 독립운동가 박정래(본명 박봉래)를 회장으로 하여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인 신대한동맹회의 총무로 영입돼 활동했다. 1920년에는 직접적으로 상해에 자리하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관을 맺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 자격으로 중국 각 성을 방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과 지원을 요청하는 등 여러 방면으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 이후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다가 기강에 자리하던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충청도 지역 보결의원으로 선임되면서부터다. 본격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맹활약한 것은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이동한 후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경에 자리한 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 1940년 한국 광복군이 창설될 때 총사령부 주계로 임명돼 활동했다. 

그의 장남인 이건우 역시 광복군으로 활동했다. 2대에 걸친 나라 사랑을 실천한 것이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행정부에도 참여했다. 1941년 회계 검사원에 검사원으로 참여한 가운데 1944년에는 회계검사원 검사원장 및 국무위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에도 참여해 1940년 내무부 산하에 생계위원회가 설치될 때 생계위원으로, 1943년 생활부가 설치될 때에는 생활위원으로, 1944년 생계설계위원회가 설치될 때에는 생계설계위원으로 참여했다. 더 1943년 자신이 몸담고 있던 한국독립당에서는 중앙 감찰 위원으로 선출됐다.

이 외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거주지인 토교에 설립된 신한교회 담임목사로 활동하며 1944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여당과 야당 내 기독교인들을 아우르는 여화한인기독교연합회를 창립했다. 그가 담임 목회를 했던 신한교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련된 교회로 스웨덴 루터교회가 건축해 준 교회였다. 중립국이었던 스웨덴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직접적으로 지원해 주기보다는 교회를 건축해 주는 우회적인 지원을 해 준 것이다. 이러한 신한교회는 광복군의 막사로 이용되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광복된 후 귀국 대열에 합류하지 않고 중국에 남아 교민들을 보호하고 안전한 귀국을 돕는 주화한교선무단의 화중구 한교선무단장으로 활동하다가 국공내전이 발생, 대만으로 건너가 대만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권익보호단체인 대만한교협회 초대 이사장으로 1948년 선출돼 활동했다. 그는 망명 생활을 한 지 30년만인 1949년 귀국해 백범 김구 선생이 기거하던 경교장에 함께 거주하며 한국독립당 중앙감찰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칩거생활을 하다가 차남 이건식 씨 자택에서 1955년 1월 8일 소천해 국립서울현충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묘역에 안장됐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는 실로 충절의 고장 홍성에 걸맞은 홍성이 낳은 지조있는 독립운동가임에 틀림없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