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정말 길 위에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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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정말 길 위에 있나요"
  • 한관우 편집국장
  • 승인 2009.07.30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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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만다라(曼茶羅)의 작가, 김성동(金聖東)을 아십니까. 김성동과의 만남이란 인연은 새벽 산사에서 울리는 정신적 영혼이며, 진실이고, 솔향기 그 자체였다. 첫 인연은 고등학교 시절인 1974년 주간종교에 당선된 <목탁조(木鐸鳥)>와 1978년 소설 <만다라(曼茶羅)>였으며, 1982년 병아리 기자시절 연재소설 담당기자로서의 만남이었다. 김성동이 특유의 묵직한 필체로 만년필을 이용해 원고지를 세로로 메워 자전적 소설 <침묵의 산>을 집필하던 때이다. 그런데 이 연재소설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원고를 받은 이후 연락이 닿지를 않았는데, 교통사고였다. 도무지 연락이 되지를 않았다. 이후의 만남은 소설가 김상렬이 입원실을 지키고 있던 1983년 봄날 서울 명동의 백병원에서였다. 

김성동은 1947년 지금의 보령시 청라면 장현리에서 태어났다. 동구 앞 저 멀리로 대천과 화성을 가로지르는 신작로가 보이고, 해발 790미터인 오서산의 산자락이 마을을 휘감고 있는 구렛굴이라는 산촌이었다고 한다. 이른바 몰락한 양반의 후예로서 병자호란 당시 우의정으로 빈궁과 원손을 수행하고 강화도로 갔다가 강화성이 함락되자 화약궤를 끌어안고 순절한 문충공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선생이 김성동의 13대조인데, 가족사 또한 소설 같다.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선생은 김상용의 12대 종손이며, 척화파의 거두였던 문정공 김상헌(尙憲)은 김상용의 친동생으로 절의정신과 척화정신은 김복한의 의병정신으로 계승됐다. 김복한은 우부승지까지 올랐으나 갑오변란 등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 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홍주(지금의 홍성)로 낙향 홍주의병의 중심이 됐으며, 파리강화회의에 글을 보내 독립과 유민(遺民)의 원통함을 호소했다. 이 기념비는 지난 2007년 홍성의 대교공원에 세워졌다. 또 독립기념관은(관장 김주현)은 지난 24일 오전 대전광역시 유성호텔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을 맞아 홍주의병 활동을 기록한 홍순배의 󰡐해암사록(1906)󰡑과 독립운동가 윤교병 선생이 서대문형무소에서 받은 옥중편지, 홍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최명용 선생의 유품과 자료를 비롯해 대전․충남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자료가 일반인들에게 처음으로 공개됐다. 홍주 1000년의 숨은 역사와 문화, 그 기록들이 우리 앞에 공개된다는 큰 의미로 다가온다. 역사의 진실과 진리가 새로운 홍주역사 1000년을 기록할 것이기 때문이다. 

김성동의 아버지(김봉한)는 1948년 예비검속으로 대전교도소에 수감됐고, 1950년 대덕의 산내 처형장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좌익인사라는 이유였다. 어머니(한희전)는 제삿날도 몰라 남편의 생일날에 제사상을 차려왔다. 그런 어머니도 여성동맹위원장을 했다는 이유로 모진고문을 당했고, 외가는 좌익들에게 풍비박산이 났다. 외삼촌은 홍성에서 면장을 했는데 반동이라는 이유로 인민재판에서 처형당하는 등 김성동의 아픈 가족사는 우리역사가 남긴 상흔이라는 생각에 순간 오금이 저려온다. 

서라벌고교를 중퇴한 열아홉 소년 김성동은 서울의 세검정에서 우연히 만난 노승을 따라 도봉산 천축사로 향했고, 정각(正覺)이란 법명으로 합천 해인사와 해남 대흥사를 떠돌다가 일본 유학길을 오르려는 순간 '붉은 씨앗'이란 이유로 좌절, 절망을 가슴에 새기고 방황하며 문학을 만나게 된다. 그의 삶 속에서 묻어나온 첫 소설 <목탁조>는 당시 조계종의 시비로 인해 결국 승적을 박탈당했는데 '무승적'이었다. 애당초 승적을 만들지도 않았으니 '무승적 제적'이란 꼬리표만 붙인 결과다. 이후 <목탁조>는 <만다라>가 되어 독서계의 돌풍을 일으키며 안성기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져 절망에서 연유한 '지산'의 만행과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뇌하며 끝없이 떠도는 '법운'의 방랑은 젊은이들의 감수성을 사로잡았다.
 
당시 '병 속의 새를 어떻게 꺼낼 것인가'라는 화두는 법운만의 몫이 아니라 독자와 우리네 민중의 몫이 되었다. 김성동은 인생이 슬프고 세상이 막막한 사람들을 모아 함께 살고 싶어 하며 '고루살이(공동체)'에 관심이 많다. 

세상이 정말로 많이 변해서 10여년 만에 그리던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어서 아직도 가슴이 떨린다. 서울의 불광동 집에서 함께한 된장찌개 뚝배기맛과 저녁밥도 그립다. 외로우면 발길 돌려 시작했던 술판에서 인생 삶의 애환에 목메던 이후에 많은 세월이 지났다. 세상의 한 모퉁이에서 성실한 노력으로 인정받겠다던 자존심도 출신과 학벌, 쯩과 빽, 돈에 멍이 드는데, 그것도 부족했는지 1993년 정월 초이튿날 홍성에서 설을 보내는 시간 광화문의 살림집이 전소되는 깊은 절망을 경험했다. 때맞춰 일터였던 출판사도 연구소도 바람을 타면서 속임 꾼들의 잔꾀에 속아 애로가 생겼다. 그래서 일터와 삶터를 바꾸면서 기별이 끊긴 이유였다는 변명으로 용서와 세월의 아쉬움을 달랜다.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밥을 먹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하는데, 참으로 그것이 쉽지가 않다. 사람은 노동과 생존과 휴식이란 법칙 속에 살아가면서 어느 것 하나라도 어긋나게 되면 삶을 이어갈 수 없게 된다는 이치를 알면서도 타는 목마름 이다. 그 타는 목마름의 중심에는 이 세상에서 존경할 수밖에 없는 어머니가 성치 않은 몸으로 홀로이기 때문이다. 원치 않았지만 변신한 일터에서의 10년 세월은 새로운 세상의 경험과 정말 많은 사람을 얻고 또 만났다. 하지만 정치와 관련된 단어와의 삶은 계속할 길이 아니라면 더 이상 전진의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세월이 점점 짧아진다는 조바심에 장항선 열차에 몸을 싣고 고향집을 향했다. 그리고 민주화 열망에 한겨레신문이 만들어진 후 전국 최초의 지역신문이란 이름표를 달고 탄생한 신문사를 일터로 삼아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세상의 온갖 선악과 시비를 잡고 늘어져 시시콜콜 대필하는 잔소리의 품삯을 받으며 할일 많은 세상 언저리에서 한동안 살았다. 하지만 진실과 진심, 열정이 왜곡되는 슬픈 경험을 하면서 선악과 시비의 정곡, 진리를 잡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양심의 고통을 처절히 경험했다. 

세상에 태어나 어느덧 지천명(知天命)을 안고 살아간다. 아직도 세상 삶의 이치를 깨닫지 못해 지금도 진리를 잡겠다고 길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아직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실체가 보이지를 않는다. 다만 우리네 삶이 쏟아내는 말이라도 잘 듣기로 마음먹었다. 그동안 삶을 함께 나눠온 수많은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인연의 소중함을 가슴으로 깊이 안고 살아가려고 한다. 삶의 소리에서 우리 사회의 희망과 행복을 설계하기도 하고 처절한 슬픔과 고통도 함께 나누겠다는 다짐의 약속을 해보면서 말이다. 

삶은 목탁일까. <진혼곡> 같은 소설로 가슴을 점령당한 '삼판'(돌판, 중판, 글판)의 자유스러움, 지금 양평의 옥천에 비치는 세상사와 진솔한 삶의 모습이 진실로 그립다. 또 한해의 절반이 지났다. 그래서 가까운 시일 피안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 진실을 찾아가고 싶다. 지난 1000년 세월의 겹겹에서 아직도 묻어나는 홍주의 역사와 문화, 사람과 삶의 진리를 찾아 희망과 행복의 언어를 창조하고 싶은 솔직한 심정이다. 사람 사는 냄새가 진하게 나는 삶의 언어를 실소로 묻어나는 잔소리가 아닌 진솔한 대화와 언어의 기록으로 참 삶을 가꾸는 희망을 이야기 하고 싶다. 하얀 밤을 밝히면서 말이다. 새벽은 밤의 끝이지만 또한 아침의 시작이라는 진리 앞에 언어를 통해 종이에 인간 삶의 문자를 늘 새롭고 진실하게 기록하려고 부단히 노력할 것을 다짐해 본다.

홍주신문 제84호(2009년 7월 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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