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 지역문화의 정체성 찾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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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지역문화의 정체성 찾자(1)
  • 전상진 기자
  • 승인 2009.12.04 14: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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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의 문화자산 - 홍성의 문화예술 인물들을 중심으로
<기획> 홍성 문화예술, 오늘의 문제와 내일의 과제 ②

홍성의 문화예술이 침체돼 있다. 작지만 꾸준한 활동을 하고 있는 지역 문화예술 단체들은 자생력을 제대로 갖춰나가는 일이 과제로 떠올랐다. 그리고 지역 문화예술을 지원하고 후원하는 기관단체는 보다 적극적이고 근본적인 지원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지역 내 문화예술 공간이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도록 창의적인 방안도 세워져야 한다. 현재 지역 문화예술 발전과제뿐만 아니라 홍성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문화 기반이 조성돼야 한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지역 문화예술이 앞으로 나갈 방향을 살피며,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또 많은 지역민들과 지역 문화예술의 발전과제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홍성은 많은 역사인물들이 배출된 곳이다. 역사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는 홍성지역을 󰡐인물의 고장󰡑이라고 부르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다른 지역의 평가와는 무관하게 과거의 역사인물뿐만 아니라 현재 각 분야에서 알토란같고 톡톡히 각자의 몫을 다하고 있는 홍성사람들을 볼 때 인물의 고장다운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역사인물들의 활동과 업적을 살펴봐도 단연 지역을 넘어서 우뚝 선 인물들이 많다. 홍성을 넘어서 이 나라의 위기를 구하고 역사발전에 원동력이 되었던 인물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시대를 넘어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지금도 시대정신을 일깨워주는 인물들이 홍성에는 넘쳐난다. 역사적으로 보면 인물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시기는 고려시대부터 비롯된다고 여겨진다. 물론 그 전 시기에도 뛰어난 인물들은 있겠지만, 역사기록의 관점으로 볼 때 남겨진 기록이 미미한 점으로 미루어 고려시대부터 홍성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봐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일부 사람들은 언제까지 과거의 인물들을 끄집어내어 연연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오히려 현재의 인물들에 대한 본격적인 평가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물론 일부 의견은 수긍할 수 있다. 허나 현재의 삶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나를 생각한다면 여전히 역사인물들에 대한 업적을 기리고 계승 발전시키는데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지금까지 홍성의 역사인물 평가 및 계승 사업은 주로 나라의 위기를 구하고 충절로 절의를 지킨 구국, 충의인물과 공․명신 관료, 효열과 선행인물, 유학과 관련된 인물들로 한정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위의 인물들도 또 다른 분야(문화예술, 학문)의 업적보다도 구국, 충의에 관련한 업적이 부각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문화예술, 학문적 업적 등이 소홀해지고 홀대받는 경우가 더러 있다. 

앞으로 문화기반이 지역의 창조적인 가치를 높이고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본다면 상대적으로 홀대받았던 문화예술, 학문의 일가를 이룬 인물들이 제대로 대접받고 그들의 문화적 업적이 재평가되어야 한다. 



홍성에는 문화예술, 학문의 일가를 이룬 인물들이 많다. 학문적, 문학적 업적으로 보면 통일신라시대 대문장가인 고운 최치원 선생(857~?)의 발자취가 장곡면 월계리에 남아 있고, 고려중기 한림학사 매호 진화(생몰연대 미상) 선생이 여양(지금의 홍성 장곡면)에 터를 잡아 중앙에 진출한 <한림별곡>에도 언급될 정도로 뛰어난 문장가로 손꼽히고 있다. 조선전기 집현전 학사로 훈민정음 창제를 도와 음운학 연구를 위해서 중국을 13번이나 왕래하며, 우리말글 창제의 일등공신 역할을 한 매죽헌 성삼문 선생(1418~1456)이 홍북면 노은리에서 태어나 충직한 성품으로 큰 절개를 지킨 대학자로 명망이 높다. 조선 중기에는 서얼(서출)이라는 불우한 출생과 임진왜란, 가난에 대한 처절한 아픔을 방랑생활과 시를 벗 삼아 삼당파 시인(고죽 최경창, 옥봉 백광훈)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한 허균과 허난설헌의 스승 손곡 이달 선생(1539~1612, 추정)이 구항면 황곡리 하대마을 출신이라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지금 홍성군청 뒤편에 손곡 이달의 시비 '예맥요(보리 베는 노래)'가 남아 있다. 조선 성리학의 기호학파 주기설을 계승해 호론(선악이 공존하는 현실적 인간의 모순성을 해명해 해결하려는 학문)을 완성한 대학자 남당 한원진 선생(1682~1751)이 서부면 남당리에 큰 거취를 남기고 있다. 한원진 선생의 사상은 뒤에 김복한, 민종식 등 항일의병의 정신과 이론의 토대를 만들었다. 구한말 전인적 인간으로 평가받고 있는 독립혁명가, 불교사상가, <님의 침묵>의 민족시인인 만해 한용운 선사(1879~1944)에 이르기까지 홍성에는 태산준령과도 같은 인물들이 큰 산을 이루고 있다. 또 최근에는 갈산면 오두리에 '갈뫼(안동)김씨'의 뿌리를 내리게 한 청주 김성달(1642~1696)․연안이씨 이옥재(1643~1690) 부부, 김성달의 첩인 울산이씨(생몰연대 미상)의 시집 <안동세고>와 그들의 자녀 5남 4녀의 문학적 재능을 시 421편에 담고 있는 <연주록>이 한문학자 문희순(46․지역여성문화연구소) 공동대표의 발굴로 새롭게 홍성지역 문화사에 주목을 받고 있다.

문학적․학문적 업적 평가 소홀 

이같이 홍성역사의 큰 산을 이루고 있는 인물들에 대한 평가 자체가 아예 이루어지지 못했거나 또는 지나치게 구국과 충절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문학적, 학문적인 업적이 소홀히 다루어진 경우가 많다. 

또한 문화예술 인물로는 지금까지 결성 최선달(1726~1805, 추정)이란 이름만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실려 판소리 시조로 알려진 최예운 선생(결성면 금곡리 원금금마을 출생, 추정)이 있다. 아직 더 많은 자료 확보와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인물로 결성농요의 뿌리를 알 수 있는 단서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또 한국 전통춤을 집대성해 전통춤 맥을 지키고 가꾼 전통춤의 아버지 한성준 선생(1874~1941)은 갈산면 신안리에 태어나 '불세출의 기술자'라는 찬사를 받은 명고수로 활약하며 전통음악과 전통춤을 창조적으로 만든 전통예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27호 '승무'와 92호 '태평무' 등 40여 편의 전통춤을 창작한 명고명무로 내년도에 '한성준전통춤예술관'이 건립 추진될 예정이다. 그리고 동양의 사의적 표현, 꼴라주, 문자추상, 군상 등 한국 현대미술의 독특한 발자취를 남긴 거장 고암 이응로 화백(1904~1989)은 홍북면 중계리 출신으로 최근 생가복원 및 기념관 건립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 홍성에서는 문화예술, 학문적 업적의 일가를 이룬 인물들에 대한 재평가와 기념사업이 활발하게 펼쳐져야 한다. 축제나 문화예술 공연이 21세기 지역가치를 높이는 최대의 자산이라면 이제라도 이 인물들에 대한 심도 깊은 발굴과 올바른 평가 및 기념사업이 다양한 방안을 갖고 마련되어야 한다. 또한 관 주도의 기념사업보다는 문화예술 단체들이 앞장 서 민간주도의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지고 문화예술 인물들에 대한 학술제 및 공연예술 행사가 펼쳐져야 한다. 처음에는 작은 사업에서부터 차근차근 추진해 내실 있고 제대로 된 기념사업을 만들고, 이를 토대로 전국 규모의 기념사업을 가능하게 하여 홍성지역의 무형 문화자산으로 최고의 가치를 만들고 해당 인물들의 업적을 자긍심으로 높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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