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창 밖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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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창 밖 아버지
  • 현 자(홍성여중 교사)
  • 승인 2010.04.26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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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 교사의 교단일기]

학생들을 훈계할 때, 나도 모르게 자주 쓰는 말이 <부모님을 생각해 보라>이다. 예로부터 효도란 백 가지 행실의 근본이라 했으니, 고생하시는 부모님의 은공을 헤아릴 줄 안다면 당연히 바른 행동을 할 것이요 공부도 열심히 하겠기 때문이다. 부끄럽지만 내가 교단에 설 수 있었던 것도 선친의 지극하신 정성과 그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았던 나의 노력이 서로 통했기 때문이다.

아홉 살 때 조실부모하신 아버지는 인생소설책 열댓 권을 쓰실 고생을 하셨다 한다. 동네 제일 부지런하셨으며 근검절약으로 한 뙤기씩 전답을 장만하셔서 칠남매를 키워내셨다. 그러면서도 인정을 많이 베푸셨는데 특히 일 년 한두 차례 선생님들의 가정방문 때에는 들에서 일하시다 말고 달려오셔서 극진히 예우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어렸을 적부터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을 키우게 되었다.

아버지는 3월 학기 초가 되면 딸을 위해 아껴둔 돈을 서슴없이 쓰셨다. 그 당시 물자가 귀하던 시절에는 학부모가 학급에서 쓸 시험지를 사다주는 것이 무엇보다 반가운 일이었는데, 아버지는 누런 갱지 한 아름과 함석양동이, 자루걸레 두어 개와 교실 거울 등을 사가지고 오셔서 유리창 너머로 밀어 넣어 주시고는 아이들 틈에 얼굴 발그레한 나를 잠시 흐뭇하니 바라보시다가 "이따 조심해서 오너라, 니?" 하시고는 창턱 아래 자갈돌을 밟으시며 급히 학교를 떠나셨다. 아버지가 사다주신 시험지가 자랑스럽고 아까워서 나는 글씨 한자라도 틀릴까 반듯반듯 써 내려갔다.

중학교 2학년쯤이던가는 느닷없이 장대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천둥에 번개에 다들 혼비백산하여 버스를 탔다. 금세 멀리 냇둑 위로 벌겋게 황토물이 차오르고 비포장 신작로는 옆 논에서 흘러넘치는 물로 넘실거렸다. 어린 마음에 여기저기 콸콸 흘러넘치는 물은 얼마나 무섭던지 맘을 졸이며 버스에서 내리니 그 비를 다 맞으시며 아버지가 서 계셨다.

아버지는 나를 보자 얼른 우산을 쥐어 주시고, 품속에서 비닐 비료부대를 꺼내 내 책가방을 낚듯이 가져가 집어넣고는 그것도 모자라 겨드랑이 아래 바짝 끼고 우산을 기울이셨다. 아버지 등판에 빗물이 줄줄 흘러 누런 베적삼이 아버지 등짝에 찰싹 붙어버렸다. "아버지, 책가방은 괜찮으니 우산 좀 쓰세요!" 하는 나의 외침에 오히려 우산을 책가방 쪽으로 더 기울이셨다. "책 젖으면 우리 딸 공부 못한다, 아버지보다 이 책가방이 더 소중허여" 하시며 집에 도착하여 토방 위로 들어서시고야 겨드랑이 책가방을 내려 놓으셨다.

학창시절 공부를 하다가 힘들 때마다 아버지의 그때 모습을 떠올리며 힘을 얻었다. 그리고 교사가 된 지금도 교실 창 밖 아버지는 "남의 자식 소중히 여기거라!" 내 모습을 지켜보고 계시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해진다.

정부가 금년부터 전국의 초·중·고교 2,000개 우수 학부모회에 교당 500만원 내외씩 총 100억 규모의 예산을 지원하여 학부모의 학교 운영 참여를 적극 확대한다고 한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의 자녀 교육은 어머니들 차지가 되어버리고, 학교행사에서도 아버지의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헌신하느라 그런 것임은 두말할 것 없지만 가정의 중심은 아버지, 어머니인 만큼 이 기회에 잠깐씩 틈을 내어 더 많은 아버지들이 자녀 교육에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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