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브란스 의사, 추석 쇠러 왔다가 처남과 같이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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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란스 의사, 추석 쇠러 왔다가 처남과 같이 끌려갔다
  • 박만순 오마이뉴스 기자
  • 승인 2021.06.12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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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충남홍성군유족회 김동규·이기만

“6·25 전쟁 당시 학살돼 집단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민간인의 유해가 충남 홍성에서 발굴됐습니다. 조사단과 유족은 특별법 제정 등 국가 차원의 후속 조치를 호소했습니다. 이상곤 기자의 보도입니다.”

TV에서 나오는 소리에 김동규(1948년생)는 화들짝 놀랐다. 66년간 잊혀졌던 비밀 창고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는 멍하니 TV를 응시했다. 뉴스는 이어졌다.

“충남 홍성군 폐금광에서 발굴된 유해는 적게 잡아도 21구로 두개골에서 M1 소총 탄두가 발견된 것도 있습니다. 유해들은 대부분 성인 남성으로 추정되며, 굴 안쪽에서 서로 엉킨 채 무더기로 발견됐습니다. 이름이 적힌 라이터와 단추, 벨트 등 유품도 함께 출토됐습니다.”

다음부터 이어진 다른 뉴스는 김동규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6.25’, ‘홍성’, ‘집단 매장’, ‘유해발굴’이라는 단어가 그가 알아들은 것의 전부였다. ‘6.25때 홍성에서 집단학살 된 이들에 대한 유해발굴’이라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뉴스가 거짓말을 할 리 없지 않은가? 그는 그날 근무를 마치고 방송국 보도국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YTN이죠? 아까 뉴스에 나왔던 홍성 유해 발굴 때문에 그러는데요.”

그렇게 김동규는 2016년 3월 6일 뉴스를 확인해 들어갔다. 뉴스는 틀림없는 사실이었고, 충남 홍성군 광천읍에서 한국전쟁기 유해매장지를 발굴한 결과 총 21구의 유해가 나왔다는 것이다. YTN에서 알려준 홍성유족회장 연락처로 다음날 바로 전화했다. 전화를 받은 황선항 유족회장은 “아이고, 그 짝도 유족입니까?”라며 되물었다. 수십 년 만에 잃어버린 형제를 만난 기분이었다.
 

■ DNA 감식으로 아버지 유해 찾아
그해 4월 김동규는 홍성군 구항면 황선항 회장 사무실에 찾아갔다. 그제서야 2005년에 과거사법이 제정됐고, 1차로 민간인학살사건이 진실규명 됐음을 알게 됐다. 김동규는 기가 막혔다. ‘사는 게 뭔지’ 정신없이 살다 보니 과거사법도 몰랐던 것이 마치 자기 잘못인 양 생각돼 부끄러웠다. “지금이라도 유족회에 가입해서, 추가로 진실규명 될 수 있도록 같이 노력해봅시다”라는 황선항 회장의 소리에 그는 정신을 차렸다.

그때부터 김동규는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의 진실 규명에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2016년 5월 20일 홍성군청에서 열린 ‘유해 발굴 최종보고회’를 시작으로 매년 가을 용봉산에서 열리는 위령제에도 꼬박 참석했다.

그러다가 2018년 홍성군 유해발굴과 관련해 DNA 감식비용이 편성됐다는 희소식이 들려왔다. 2016년 발굴된 21구 유해 중 치아, 대퇴부 등을 중점적으로 채취했다. 이후 유족들의 DNA를 채취해서 친자 유무, 동일부계 혈족인지를 분석했다. 김동규는 2016년 홍성군청에서 열린 최종보고회 때 당시 유해 중에 아버지의 유해가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발굴된 유품 중 겉옷 및 와이셔츠 단추, 구두 밑창 등이 아버지가 사용하던 것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김동규는 부친 김숙제가 서울 세브란스병원 근무 시 입었던 옷과 신었던 신발이 나온 사진을 간직하고 있었다. 사진을 유해발굴단장에게 보여주니 “맞는 것 같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후 DNA 감식을 통해서 최종 확인하셔야 겠습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DNA 감식 결과는 ‘70% 일치’였다. 김동규의 아버지 김숙제를 포함한 4구의 유해 중 일부가 용봉산에 모셔졌다. 68년을 떠돌던 원혼이 안식처를 찾았다.
 

■ 세브란스 병원 의사가 ‘부역혐의’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무렵 김숙제(1927년생)는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세브란스병원에 의사로 재직했다. 전쟁 직후 한강다리가 끊기면서 피난을 가지 못한 그는 추석을 앞둔 9월 7일 충남 홍성군 광천읍 내죽리로 내려왔다. 그곳에는 부모님이 살고 계셨다. 

그런 그가 내려온 지 채 한 달도 안 돼 치안대에 연행되었다. 다름 아닌 ‘부역혐의’였다. 그는 서울에 있을 때나 광천에 내려왔을 때나 부역과는 하등 관련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왜 연행되었을까? 그의 손위 처남 서석기가 북한군이 주둔하던 인민공화국 시절 홍성군 노동당 서기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김숙제는 처남 서석기와 함께 1950년 10월 초 광천지서에 연행됐다. 김동규의 어머니 정태수가 지서에 밥을 해 날랐는데, 그는 “어머니, 조금 있으면 나가니 걱정하지 마세요”라며 안심시켰다.

김숙제의 말은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1950년 10월 7일 홍성군 광천읍 담산리 폐광 앞에서 피의 살육제가 벌어졌다. 이곳에서 젊디젊은 세브란스병원 의사도 이승과 작별했다. 이곳에서 부역혐의자 70~80명이 학살됐다. 학살 후 경찰은 마을 주민에게 “시체 치워라”라고 시켰다. 마을 사람들이 가마니에 나무를 끼워 담가(擔架)를 만들어, 시신을 폐광에 매장했다. 주검 중에는 김숙제를 포함 광천읍 내죽리 사람 7명이 있었는데, 누구도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 630명~1000명 부역혐의로 죽어
1950년 10~11월 홍성군에서는 소위 부역자들에 대한 불법적 처벌이 곳곳에서 있었다. 홍성읍 월산리 주민 17명이 그해 10~11월 ‘소향리 붉은고개’에서 학살됐다. 홍성군 금마면 송암리 강문구와 윤창호의 아버지는 인공시절 인민위원회에서 일을 했다는 이유로, 금마지서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지서 뒤편 화양리 안골에서 죽임을 당했다. 홍성군 홍북면 대동리 장만성은 마을 큰길에서 술집을 운영했는데, 수복 후 치안대에 연행돼 대동리 뒷산에서 살해됐고, 그의 아내도 죽었으나 장소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렇게 홍성 곳곳에서 피의 살육제가 벌어진 것은 홍성경찰서 차원에서 실행된 조직적인 부역혐의자 학살 계획 때문이다.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수복 후 ‘부역자 처리’는 각 지서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각 면 단위에서 자체적으로 진행됐고(1950년) 11월 말경이 돼서야 각 지서에 구금된 부역자들을 홍성경찰서로 이송했다.

수복 후 홍성경찰서 유치장 8동에는 각 동에 70~80명씩 500~600여 명의 사람들이 구금돼 있었고 이들 중 100여 명은 소향리 붉은고개로 끌려가 집단살해 됐다. 그보다 적은 수는 용봉산 절 입구 골짜기에서 집단살해 됐다.(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는 10곳의 장소에서 630명 이상이 희생당했다고 진실규명 결정했다. 홍성유족회(회장 이종민)는 최대 1000명이 학살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 평생을 목수 생활 
하얀 바지저고리를 입은 아버지 이창성(홍성군 홍동면 월현리)이 텃밭에서 끌려가는 모습을 목격한 이기만(1946년생, 김포시 고촌읍 신곡리)은 다시는 아버지를 볼 수 없었다. 이기만은 1950년 10월 17일 경찰에 의해 ‘부역혐의’로 학살됐다.

아버지 없는 자리는 너무나 컸고 식구들은 각자도생했다. 큰형은 농사를 짓고, 둘째 형은 홍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양복점 기술을 배웠다. 큰누나는 일찍 결혼했고, 작은누나는 식모살이를 했다. 이기만은 홍동국민학교를 졸업했는데, 형이 “가정경제를 생각해서 머슴 가라”고 했지만, 싫다고 했다. 19세에 상경해 서울 삼각지 영신가구에서 목공 세계에 뛰어들었다. 잠은 공장 천장에서 잤는데, 밤에는 한글과 영어를 독학했다.

이기만은 40여 일을 배우고 나서 영등포 가구공장으로 옮겨 대패질을 배우고 도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도면을 그리면서부터 독자적인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첫 월급은 1년 후에나 탈 수 있었다. 1년 만에 받은 첫 월급은 500원이었는데, 혼자 작업을 시작하고부터는 1만 3000원으로 껑충 뛰었다. 월급이 안정되자 이기만은 시골에 사는 어머니 주가금에게 매월 1만 원씩 송금했다. 송아지를 장만할 돈이었다. 하지만 이기만의 어머니는 송아지를 사 보지도 못한 채 61세에 작고했다.

목수 일로 평생을 보낸 그는 2021년 현재 김포에서 빌딩 관리소장을 하고 있다. 아내와 부지런히 일을 해 집 두 채도 장만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하는 것이 그의 남은 바람이다. 
 

■ 경찰서 정보과장 신원보증으로 쿠웨이트 가
세브란스 병원 의사였던 아버지 김숙제를 잃은 김동규는 대평초등학교 졸업 후 홍성군 광천읍 내죽리에 있는 서당을 3년 다녔다. 이후에는 건축 일에 뛰어들었다.

1975년 삼호주택에 근무할 때 쿠웨이트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신원조회에서 걸렸다. 회사에서 경찰서 정보과장 이상의 신원보증을 받아 오라고 했다. 그는 이전에 집을 지어준 적이 있는 천안경찰서 정보과장에게 부탁해 간신히 쿠웨이트에 갈 수 있었다. 

젊은 시절을 건설업계에서 보낸 김동규는 지금은 건물 경비 일을 하고 있다. 그러다가 2016년 직장에서 YTN 뉴스를 접한 것이다. 김동규 역시 이기만처럼 아버지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이 남은 생 최대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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