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그냥 좋아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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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그냥 좋아지지 않는다
  • 윤정용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2.03.31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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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철도원 삼대》(2020)는 식민지 시기부터 분단된 후기 자본주의 세계화 체제의 한반도에서 지난 백여 년 동안 살아온 노동자들의 꿈이 어떻게 변형되고 일그러져왔는지를 긴 호흡으로 일별하고 있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산업노동자를 전면에 내세워 그들의 근현대 백여 년에 걸친 삶의 노정을 거쳐 현재 한국 노동자들의 삶의 뿌리를 드러내려 한다. 하지만 작가의 말처럼 “노동자 의식은 감춰지거나 사라졌지만 그들의 삶의 조건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철도원 삼대》(2020)에 대한 구상이 1989년 방북 때 평양에서 만난 어느 노인의 이야기에서 비롯됐다. 그는 그 노인이 서울말을 쓰고 있다는 데 흥미를 느껴 초대소 보장성원들에게 간청해 다시 만나 그의 인생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노인으로부터 그의 아버지가 영등포 철도공작창에 다니던 이야기, 자신이 철도학교에 들어간 이야기, 기관수로 대륙을 넘나들던 이야기 등을 직접 들었다. 또한 해방 이후 전평이 미군정의 압박을 받고 그가 도피하여 아들을 데리고 월북했던 이야기, 십 대 소년이었던 그의 아들이 전쟁이 터지자 단기 속성 과정을 마치고 기관수가 돼 낙동강 전선의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이야기 등을 들었다.

작가 황석영이 들은 노인의 이야기는 《철도원 삼대》 속 이백만, 이일철, 이지산 삼대의 이야기로 형상화된다. 주지하듯 한국 근현대문학에서 산업노동자의 이야기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작가의 말처럼, 최근까지 쓰인 장편소설의 경우 대부분 농민을 위주로 한 작품들이다. 한국의 노동운동의 역사는 대략 백 년을 전후로 한다. 조선의 항일운동의 역사는 사회주의가 기본 이념의 출발점이었다. 《철도원 삼대》에서도 노동운동을 전개한 일철과 그의 동료들은 일제에 의해 ‘빨갱이’로 낙인찍힌다. 해방된 이후에도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생존권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은 일제 강점기와 마찬가지로 ‘빨갱이’로 매도당했고, 한국전쟁이 터지고 세계적인 냉전체제가 되면서 수십 년 동안의 개발 독재 시대에도 거의 모든 노동운동은 빨갱이 운동으로 불온하게 여겨졌다.

이백만의 증손자이자, 이일철의 손자이자, 이지산의 아들인 이진오는 회사 측의 부당해고에 맞서 굴뚝 농성을 무려 사백 일 동안 전개한다. 처음에 회사 측은 노조 측의 주장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지만 이진오의 투쟁으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자 어쩔 수 없이 협상 테이블에 나왔다. 회사 측은 ‘자회사를 신설해서 고용을 승계하고 노조 활동을 보장하겠다’, ‘단체협약은 내년 초까지 해결하겠다’, ‘더 이상 세상을 시끄럽게 하거나 쟁의를 벌이지 않고 농성자가 굴뚝에서 내려온다면 그동안 고소해놓았던 민형사상의 법적 책임도 묻지 않겠다’ 등 노조 측의 요구 조건에 합의했다. 그래서 이진오는 굴뚝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경찰이 업무방해죄로 일단 이진오를 경찰서로 데려가겠다고 주장하면서 노사 양측의 협상은 다시 난항을 겪는다.

결국 이진오는 굴뚝에서 내려왔고 한 달 쯤 경찰 유치장 신세를 진 뒤 우여곡절 끝에 석방됐다. 이제 협상의 합의안에 따라 해고자 가운데 끝까지 버틴 열한 사람이 복직을 할 차례였다. 하지만 회사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계속 노조에게 기다리라고 말한다. 회사는 그들이 지쳐 나가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듯하다. 회사의 바람대로 몇몇은 떠났고 몇몇은 남았다. 마지막까지 남은 이진오, 그의 동료 김 형, 막내 차 군은 서로의 눈길을 피하며 소주잔만 들여다본다. 고개를 숙이던 김 형이 “다시 올라가자. 이번엔 내가 올라가겠어”라고 말하자, 차 군은 “저두요. 김 선배, 저두 올라가겠어요”라고 답한다. 거기서 대화가 끊기고 그들은 더 이상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노동자’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얻은 임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이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동자의 범주에 들 것이다. 고용주로부터 월급을 받는 임노동자든 자영업자든 마찬가지다. 자영업자 역시 ‘스스로에게 고용된(self-employed)’ 노동자이니 말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노동자로 규정하지 않고 자신이 노동자라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어쩌면 ‘노동’이라는 단어가 갖는 어감 때문에 노동자로 규정하는 것을 꺼리고 있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노동보다는 근로라는 단어를 선호한다. 하지만 노동은 ‘행위’이고 근로는 ‘태도’라는 점에 있어 차이가 있다. 따라서 노동자는 자신을 노동자로 규정하고 마땅히 노동자로서의 의식을 가져야 한다. 노동자 의식은 노동자 스스로 노동자 계급으로서 갖는 기업이나 노동조합에 대한 의식으로 다른 누군가에 의해 주입되거나 규정될 수 없다.

《철도원 삼대》를 읽으며 내심 이백만에서 시작된 한국의 노동운동이 이진오에 이르러 온전히 결실을 보기를 바랐다. 즉 현실에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소망이기에 소설 속에서나마 이뤄지길 바랐다. 하지만 소설에서도 끝내 그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실망하거나 포기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노동운동은 본래 완성형이 아니라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노동자 의식 또한 마찬가지다. 노동의 형태가 어떻게 바뀌어도 노동이 존재하는 한 노동자는 존재하고 노동운동은 계속될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 모두 노동자다. 지금이야말로 “감춰지거나 사라졌”던 노동자 의식을 다시 꺼내고 “별로 달라지지 않”은 노동자의 “삶의 조건”을 바꿔나가야 할 때이다.

사실 이는 노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공기처럼 느끼는 자유, 평등, 정의, 공정 등과 같은 상식에도 해당한다. 지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가운데 처음부터 당연한 것은 없었다.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선거인의 자격에 재산, 신분, 성별, 교육 정도 따위의 제한을 두지 아니하고, 성년에 도달하면 누구에게나 선거권이 주어지는 선거인 보통선거가 이루어진 게 불과 백 년도 안 된다. 인류의 역사가 예거하듯이 삶의 조건은 저절로 바뀌지 않는다. 즉 ‘삶은 그냥 좋아지지 않는다.’ 이름 모를 누군가의 땀과 노력을 통해 삶의 조건이 바뀌고 좋아진 것이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 삶의 조건을 바꿔 나갈 때다.

윤정용 <문학평론가·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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