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영자와 경아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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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영자와 경아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 윤정용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04.06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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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이숭원은 《작품으로 읽는 한국 현대시사》(2021)에서 1970년대의 시를 ‘억압과 풍요, 그 모순 속의 시’로 규정했다. 주지하듯 이 시기 한국 경제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면서도 꾸준하게 성장했다. 1인당 국민소득은 1972년 255달러였으나 1980년에는 1481달러로 6배 가까이 증가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적 달성과 새마을운동의 확산으로 한국은 낙후된 농업국가에서 중화학공업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외형적 경제적 발전은 우리가 간직해야 할 귀중한 권리의 희생을 전제로 했다. 다시 말하면 국민의 기본적 자유를 법적으로 제한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다수 대중의 의사를 강제적으로 억압한 데서 얻어진 경제 수치상의 발전이었다.

국민소득이 오르자 농촌 인구가 도시로 유입돼 농촌이 붕괴되고 도시 빈민이 늘어났다. 통계에 의하면 1969년에서 1977년까지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수가 800만 명에 이른다. 도시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쌀값을 동결하고 정부가 쌀을 수매하자 농업에 환멸을 느낀 농촌의 젊은이들은 도시로 이주했다. 이렇게 해서 농촌은 붕괴되고 도시는 비대해졌다. 성장제일주의 정책은 도시와 농촌에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안겨줬다.

도시 인구가 팽창하자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중간층이 확장되고 독서 인구가 늘어났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 베스트셀러 소설이 등장하며 한국 문학사상 최초로 몇 십만 부가 판매되는 사례가 나타났고,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은 영화화돼서 다시 몇 십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정치·사회적으로는 음울한 상태였지만, 경제·문화적으로는 풍요를 보이는 이중의 모순 속에 놓여 있었다. 청바지 문화, 통기타 문화라는 말이 생기고, 대학생들도 맥줏집에 모여 울분을 토하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적 소비의 쾌감을 느끼는 시대, 억압과 향락이 공존하고 빈곤과 풍요가 공존하는 상황이 전개됐다.

문학평론가 한영현은 《냉전의 시대, 유랑하는 타자들》(2022)에서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영화에 나타난 타자성의 문화 정치 양상을 톺아본다. 그는 1970년대 한국 영화를 논하면서 이 시대를 ‘절망과 저항의 시대’로 규정한다. 특히 ‘여성’과 ‘청년’을 호출해 이들이 당대 지배 담론과 맺는 관련성에 주목한다. 1970년대에는 수많은 농촌의 젊은 남녀가 도시로 이주했다. 이들은 ‘무작정 상경 남녀’로 호명된다. 통계상으로 1960에서 1970년까지 10년 동안 한국은 82.5%의 도시 인구 증가율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도시 지역 인구의 59.8%가 사회 증가에 해당한다.

1970년대에는 수많은 사람이 도시로 밀려들었고 도시는 이른바 ‘집단 난민 수용소’를 방불케 했다. 모든 사람과 자원이 서울로 몰리는 국토의 기형적 이용구조가 나타나고 서울은 공업화와 함께 땅에서 쫓겨난 산업 난민들로 득시글거렸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인식 속에서 오로지 ‘적대적 경쟁’을 위해 달려야 하는 난민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소속감과 안정감을 제공하는 의미 있는 장소였다.

1970년대 한국 영화의 대표작을 언급할 때 약간의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영자의 전성시대>(김호선, 1975),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겨울여자>(김호선, 1977) 등이 1970년대 한국 영화를 대표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한다. 2019년 한국 영화 탄생 100돌을 맞아 <한겨레>와 CJ문화재단은 감독, 제작자, 평론가, 프로그래머, 영화사 연구자 등 다양한 영화계 전문가 38명이 참여하는 선정위원회를 꾸려 ‘한국 영화 100년을 대표하는 100선’을 선정한 바 있다. <영자의 전성시대>, <별들의 고향>, <바보들의 행진>, <겨울여자>는 모두 그 명단에 포함된다.

1960년대 한국 영화에서 ‘가족 공동체’는 중요한 분석 대상으로 호출됐다. 그런데 그 ‘가족 공동체’가 1970년대 한국 영화 분석에서는 본격적인 분석의 틀로 활용되기보다는 ‘도시화 및 산업화’와 관련된 분석 틀 속에서 간접적으로 제시된다. 1970년대 한국 영화에서 재현되는 가족은 크게 두 가지 양상으로 구분된다. 첫째, <영자의 전성시대>와 <별들의 고향>에서 재현되는 가족은 영자와 경아 등이 떠나온 고향에 존재하는 아련한 기억 속의 ‘신화적 공동체’다. 반면 <겨울여자>에서 재현되는 가족은 도시의 중산층 핵가족의 ‘현실적 공동체’라 할 수 있다.

고향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애틋한 향수를 이면에 드리운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와 <별들의 고향>에서 영자와 경아는 끝내 그들이 위안을 얻을 수 있는 대상을 발견하지 못한다. 경아는 여러 남자들과의 새로운 삶, 즉 새로운 가족을 구성하고자 노력하지만 모두 실패한다. 엄마에게 보낸 편지마저 반송되었다는 되뇌는 경아에게는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 그녀가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문오와 함께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안정감과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어떤 의미 있는 장소 또는 존재였다. 하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다. 고향과 어머니는 도시에서 실패한 경아가 돌아갈 수 있는 최후의 보루였다. 하지만 그곳으로부터 반송된 편지가 비유하듯 그녀는 귀환의 불가능성에 직면한 채 죽음에 이르게 된다.

<별들의 고향>에서 경아가 가족 공동체로 귀환하는 데 실패했듯이 <영자의 전성시대>에서 영자도 마찬가지로 실패한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창녀의 삶을 청산한 채 새로운 가족을 구성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녀의 성공은 진정한 고향으로의 귀환 또는 진입이 아니다. 그녀와 남편의 신체적 결핍에서 비유적으로 드러나듯 도시 밖의 가난한 빈민으로서의 삶은 여전히 불안정과 공포를 밑바탕에 드리우고 있다.

이러한 귀환의 불가능성은 도시적 삶의 불안정성뿐만 아니라, 농촌에서 도시로 밀려든 1970년대 초중반 무작정 상경 남녀들이 부딪혀야 했던 공동체적 삶에 대한 근본적 절망 및 회의와 맞닿아 있다. 무작정 상경한 그들은 도시 하층민을 형성했다. 중동 건설 붐과 강남 개발 붐으로 많은 사람들이 들썩거렸고 실제로 누군가는 이러한 경제성장의 혜택을 입었다. 하지만 1970년대 초부터 사회적 문제로 제기됐던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는 가속화되었고, 이름 없는 수많은 영자와 경아는 인권과 생존권이 위협당하는 절망적 빈곤의 시대 가장 밑바닥의 삶을 살아갔다. 그들에게는 돌아가야 할 곳도 달성해야 할 목표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경아는 어딘지 알 수 없는 무장소적 공간에서 죽음에 이르게 된다.

계급, 신분, 성별과 관계없이 누구나 그들이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그 공동체는 때로는 국가, 때로는 가족, 때로는 고향의 모습으로 발견되거나 구성된다. 그런데 근본적인 차원에서 국가, 가족, 고향 등의 집단적 공동체는 그 안에 편입돼 있다는 주체의 인식을 통해 형성될 수 있다. 1970년대 중반에는 박정희 유신 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됨으로써 사회는 일상화된 ‘예외 상태’에 놓이게 된다.

유신 체제는 국가 발전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무자비한 폭력적 방법을 동원해 국민의 기본권은 물론 체제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사회 구성원들은 자신이 귀속된 국가에 포함될 수 없으며 또한 자신이 이미 항상 포함된 국가에 귀속될 수 없다는 인식, 귀속과 포함, 외부와 내부, 예외와 규칙을 분명하게 구별할 모든 가능성을 차단당하기에 이른다. 사실상 모두가 잠재적 타자로 규정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에서 국가가 요구하는 정상성을 획득할 가망성이 없는 존재들에게는 생존의 명분이 주어질 수 없다.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인이 될 수 없을 때는 언제든지 추방될 수 있다는 두려움과 공포는 타자화된 죽음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점을 드러낸다.

주지하듯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는 조선작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있다. 원작 소설에서 영자는 죽지만 영화에서는 죽지 않는다. 이를 두고 몇몇 평자는 영화 속 영자가 오히려 하층 여성의 저항성을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별들의 고향>에서는 원작 소설과 그랬듯이 경아의 죽음이 직접적으로 재현된다. 참고로 영화는 최인호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경아의 죽음은 ‘공적 영역에서 추방된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라는 남성적 시각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경아의 죽음은 박정희 유신 체제의 파시즘이 자행한 폭력에 내몰린 타자화된 생명들의 존재적 기반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1970년대 한국 영화에서 죽음은 정상적 주체성을 위해 그어지는 경계선을 흐릿하게 한다. 또한 국가에 대한 소속감은 타자들의 완벽한 배제와 추방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을 역설한다.

<별들의 고향>의 경아의 죽음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경아는 “이런 곳에서 잠들면 안 돼”라고 말하지만 끝내 깨어나지 못한 채 하얀 눈밭 위에서 숨을 거둔다. 따뜻하고 다정한 어떤 사람 혹은 장소를 원했던 경아에게 죽음은 있을 곳이 마땅치 않은 1970년대 도시의 언저리를 배회하는 빈민들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한편으로는 중산층 가족 담론이 산업 근대화의 발전 속에서 그 신화적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도시 안팎에 생존 경쟁이라는 음울한 현실이 상존했다. 이런 현실 속에서 경아의 죽음은 도시 빈민들의 삶에 드리운 ‘임박한 죽음’ 혹은 ‘갑작스러운 죽음’을 충분히 환기한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당시 신문 기사들은 <별들의 고향>과 뒤를 이은 <영자의 전성시대>가 ‘어두운 소재’를 다루고 있다고 비판했다. ‘영자의 후배들’이라는 자극적인 기사의 제목으로 흥행을 위해 작부, 창녀, 다방 레지, 요정 마담, 호스티스 등 밑바닥 인생을 영화화하는 기획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고 혹평했다. 사실 <영자의 전성시대>는 전술했듯이 원작 소설과 다르게 영자는 창녀로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다. 그녀는 가난하지만 성실한 남자를 만나 창녀의 삶을 청산한다. 영자는 자신의 삶의 조건을 비관하지 않고 희망을 이야기한다. 이처럼 영화적 결말로 보면 <영자의 전성시대>와 <별들의 고향>은 완전히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를 같은 영화로 묶는다. 비판의 핵심은 그들의 ‘죽음’보다도 성노동자라는 ‘직업’에 있다.

원작 소설에서 경아는 번잡한 서울 거리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만, 영화 <별들의 고향>에서는 광활한 설원에서 수면제를 먹고 죽음에 이른다. 그녀의 죽음은 시각적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훨씬 더 낭만적으로 성스러운 느낌으로 연출된다. 이를 통해 성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은 삭제되고 대신 ‘성처녀’로 이미지화된다. 그런데 성처녀 이미지에서는 종교적으로 ‘성스러운’ 면보다는 세속적으로 남성들을 ‘구원하는’ 면이 강조된다.

원작 소설에서 경아의 삶의 근본적인 문제는 돈과 가난이었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녀는 문호를 비롯한 남성들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양 또는 성처녀로서의 이미지로 재현된다. 소설에서 그녀의 파멸적인 몰락에 깊이 개입되었던 자본과 생존의 문제, 그리고 그녀의 치열한 모색 과정은 영화에서 대폭 삭제된다. 대신 그녀는 예쁜 몸을 가진 인형과도 같은 남성의 전유물로 정형화된다.

하지만 성처녀 혹은 성녀로 이미지화된 그녀들은 실상 성노동자였다. 그들의 성노동자로서의 구축 과정은 몸과 자본의 문제를 함축한 삶을 현장에서 체험하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현실에서는 성노동자였으나 범람하는 대중문화와 흥행하는 영화들 속에서는 자신들의 현실적 처지와 부조리를 은폐한 이름의 수동적 존재, 즉 성녀로 호출됨으로써 1970년대의 시대적 절망과 어둠을 통과하고 있었다. <영자의 전성시대>의 영자, <별들의 고향>의 경아, 그리고 수많은 영자와 경아는 1970년대 산업 근대화에 따른 시대적 복잡성과 깊이만큼이나 당대의 시대적 징후를 드러내는 매우 복잡하고 다층적인 재현의 지층을 포함하고 있다.

윤정용 <문학평론가·칼럼·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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