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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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
  • 윤정용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4.02.08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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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사키 도모카의 《꿈속에서도 깨어나서도》(1994)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 <아사코>(하마구치 류스케, 2018)를 보면서 예전에 봤던 <중독>(박영훈, 2002)과 <정사>(이재용, 1998)가 떠올랐다. <아사코>는 오사카와 도쿄를 배경으로 몇 년에 걸쳐 전개되는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사랑 이야기다. 얼핏 보면 이 영화는 삼각관계를 다루는 흔하디흔한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는 <중독>이 형수와 시동생, <정사>가 처형과 제부의 부적절한 관계를 다루고 있는 ‘외설 영화’라고 치부할 수 없듯이,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라고 단순화할 수 없다. <아사코>는 조금 특별한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그 사랑이 결코 격정적이지 않지만 ‘은은하다’는 데 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취직한 아사코는 우연히 하루에 두 번씩이나 마주친 청년 바쿠에게 한눈에 반하고 그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아사코는 바쿠가 한곳에 머물지 못하는 습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가 떠날까봐 늘 불안하다. 바쿠는 아사코에게 “늦더라도 언제나 아사코가 있는 곳으로 반드시 돌아와”라고 말하며 그녀를 안심시킨다. 하지만 그해 겨울 바쿠는 상하이에 간다는 말만 남긴 채 돌아오지 않는다.

2년의 시간이 흐른다. 아사코는 도쿄의 ‘우니미라클’이라는 카페에서 일을 한다. 그녀는 그곳에서 우연히 바쿠와 비슷하게 생긴 남자 료헤이를 만나고 그와 자주 부딪힌다. 료헤이는 아사코가 계속해서 신경이 쓰인다. 아사코와 그녀의 룸메이트 마야는 료헤이의 신세를 지게 되어 그를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 료헤이는 회사 동료 쿠시하시와 함께 그녀를 방문한다. 마야는 쿠시하시와 연기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료헤이는 둘을 중재한다. 아사코는 그런 료헤이의 모습을 보며 그가 바쿠와 달리 상대방을 배려하는 성격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료헤이는 아사코에게 “당신이 신경이 쓰인다”고 말한다. 이 말은 ‘당신을 좋아한다’는 완곡한 표현이다. 실제로 그는 아사코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자신을 제대로 봐달라고 부탁한다. 아사코와 료헤이는 그렇게 사귀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사코는 료헤이에게 아무 이유 없이 이별을 통보한다. 료헤이는 아사코를 만나려 하지만 아사코는 그를 계속 피한다. 그러다가 둘은 우연히 만나고 결국 아사코는 료헤이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5년의 시간이 흐른다. 아사코와 료헤이는 진탄이라는 고양이를 키우며 행복하게 살아간다. 료헤이는 회사에서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오사카 본사로 전근을 앞두고 있다. 아사코와 료헤이는 고양이를 맡기고 어촌 마을로 봉사활동을 떠난다. 봉사활동에서 돌아온 뒤 아사코는 료헤이에게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어”라고 고백한다. 아사코는 료헤이와 백화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옛 친구 하루요를 만난다. 하루요는 료헤이를 보고 그가 바쿠와 너무나 닮아 깜짝 놀란다. 그녀는 료헤이에게 아사코가 “겉으로는 둥글둥글하지만, 뭐에 꽂히면 그것에만 열중한다”고 놀린다. 아사코는 하루요에게 료헤이가 바쿠와 닮았기 때문이 아니라 료헤이 자체로 사랑한다고 말한다.

아사코와 료헤이는 마야 부부와 하루요를 초대한다. 아사코는 친구들이 가고 난 뒤 료헤이에게 자신이 예전에 바쿠와 사귀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하지만 료헤이는 ‘다 지난 일’이라며 무심하게 넘긴다. 아사코는 하루요와 공원에서 배드민턴을 치다가 배우가 된 바쿠가 촬영차 공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바쿠가 탄 차가 떠날 때까지 뛰어가 손을 흔든다.

아사코와 료헤이는 마야 부부, 하루요와 송별회를 갖는다. 그런데 료헤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바쿠가 등장하고 아사코는 주변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바쿠를 따라나선다. 바쿠는 아사코에게 “다시 돌아오겠다”고 한 약속을 지켰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아사코는 “왜 지금이냐”라고 원망하지만 이내 “보고 싶었다”고 말하며 기뻐한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는 “미안해”라고 말하고 료헤이에게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바쿠는 그런 그녀를 남겨둔 채 혼자 떠난다. 그녀는 바쿠에게 “내 걱정은 더 이상 안 해도 돼”라고 말한다.

아사코는 오사카로 먼저 떠난 료헤이를 찾아가 사과한다. 료헤이는 아사코를 거부하며 고양이 진탄까지 버렸다고 냉정하게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아사코는 숲속에서 진탄을 찾는다. 아사코는 루게릭병으로 사지가 마비가 된 오카자키에게 병문안을 간다. 오카자키는 바쿠의 절친이자 그의 사촌이다. 아사코는 오카자키의 어머니 에이코의 젊은 시절 연애 이야기, 즉 늦은 밤 오사카에서 도쿄까지 가서 아침만 먹고 돌아온 이야기를 듣는다. 말은 못하지만 들을 수 있는 오카자키는 그만하라고 표정을 짓는다. 사실 그녀는 예전에도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때도 오카자키는 그만하라고 말한 바 있다. 에이코는 아사코에게 이 연애의 대상이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였다고 고백한다. 에이코는 아사코에게 “사랑을 하다 보면 때로는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정말 소중한 사람이라면 소중하게 대해줘”라고 당부한다.

아사코는 료헤이를 다시 찾아간다. 료헤이는 처음처럼 문전박대하지 않지만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아사코와 료헤이는 그저 강물만을 바라본다. 강물을 바라보며 료헤이는 “더럽다”고, 아사코는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들은 강물을 바라보며 각자 나름대로 자신의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료헤이는 그녀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더 이상 믿지 못 하겠다”고 말한다. 아사코 또한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둘은 같은 시간 같은 곳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지만 다르게 생각한다.

영화 <아사코>는 둘 사이에 믿음이 없는데 과연 그 사랑이 가능할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 감독은 아사코와 료헤이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말해주지 않는다. 아사코는 자신이 ‘료헤이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다. 반면 료헤이는 ‘아사코가 언제든지 자신을 또 버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아사코와 료헤이의 사랑의 강물은 료헤이의 말처럼 더럽지만 시간이 흐르면 아사코의 말처럼 아름다워 질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안 될 수도 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흐르는 노래 가사처럼 “자나 깨나 사랑은 흘러간다/ 한 번 피어난 사랑은 계속 간다/ (…) 둘의 사랑은 ‘흐르는 강’과 같다.” 그런데 여기에 한 소절을 보태고 싶다. 이렇게 말이다. ‘때로는 격정적으로 때로는 은은하게.’


윤정용 <문학평론가·칼럼·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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