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개인의 삶과 죽음에 관한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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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인의 삶과 죽음에 관한 텍스트
  • 윤정용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4.04.11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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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몽>(1950)이라는 ‘전설적인’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일본의 영화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 소설 <라쇼몽>과 <덤불속>을 각색한 한 영화로, 자신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걸작이며, 일본영화 사상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동일한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으로 해석하면서 본질 자체를 다르게 인식하는 현상을 이르는 일명 ‘라쇼몽 효과’(Rashomon effect)는 바로 이 영화에서 비롯되었다.

영화 <라쇼몽>은 같은 사실이라도 사람마다 전혀 다르게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을 예거한다. 영화 속 각 인물의 기억은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골라 취사선택하는 즉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재구성된 ‘주관적 기억’이다. ‘라쇼몽 효과’는 인간 기억의 주관성 때문에 객관적인 상황을 각기 주관적으로 기억하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서술하는 인간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인간은 스스로에게 결코 정직할 수 없으며, 실제보다 더 나은 자신을 만들기 위해 언제나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처럼 인간의 기억은 의도적으로 또는 의도치 않게 왜곡되고 그렇기 때문에 때때로 믿기 어렵다.

우연치 않게 에르난 디아스의 소설 《트러스트》(2022)를 읽었다. 이 소설을 옮긴이는 이 소설을 읽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흔한 명구였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보다도 ‘라쇼몽 효과’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아마도 소설 《트러스트》는 영화 <라쇼몽>과 비슷한 내용과 구조를 취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라쇼몽>이 하나의 사건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서로 다른 이야기를 펼쳐 놓는 것처럼 《트러스트》도 한 인물, 또는 그 인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하나의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여러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소설 《트러스트》는 총 4부로 구성돼 있다. 1부는 소설 속 현실의 억만장자 앤드루 베벨의 냉혈한 같은 면모를 폭로하겠다는 내용의 소설 속 소설가 해럴드 배너가 쓴 일종의 소설이다. 해럴드 배너의 소설에서 앤드루 베벨의 아내 밀드레드 베벨은 헬렌이라는 가명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한때 재기 넘치고 총명했지만 정신질환으로 고통을 겪다가 결국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2부는 앤드루 베벨의 미완성 자서전이다. 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이상적이고 완벽한 인물이다. 그의 집안은 선조 대부터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그는 뛰어난 지적 능력과 탁월한 직관을 지니고 있다. 그는 가문의 재산, 자신의 지적 능력과 직관으로 큰돈을 벌어들인다. 또한 그는 아내 밀드레드 베벨에게는 자상한 남편이기도 하다. 그의 아내는 가정에 충실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이상적인 여인인데, 그 또한 앤드루 베벨 덕분이다.

3부는 앤드루 베벨의 미완성 자서전을 대필한 작가, 아이다 파르텐자의 회고록이다. 젊은 시절 그녀는 앤드루 베벨의 개인 비서로 그의 자서전을 대필했다. 그런데 그녀의 자서전 대필 작업은 조금 특별했다. 일반적인 자서전 대필은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은 뒤 윤문을 거친다. 하지만 그녀는 앤드루 베벨이 불러주는 내용에 그녀 자신의 경험을 추가했다. 그녀의 작업은 일종의 소설 쓰기였다. 그 소설 쓰기는 그녀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집필된 원고는 앤드루 베벨로부터 검열을 받았고, 그녀는 앤드루 베벨이 원하는 대로 자서전을 쓸 수밖에 없었다.

4부는 아이다 파르텐자가 발견했다고 하는 밀드레드 베벨의 일기다. 이 일기에서 밀드레드 베벨은 ‘재기 넘치고 총명했지만 결국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인 인물’ 또는 ‘가정에 충실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이상적인 여인’이 아니라 ‘앤드루 베벨을 뒤에서 움직인 천재적인 투자자이자 대단히 안목이 높은 현대음악의 후원자’로 그려진다. 즉 그녀의 지성은 취미 차원에 머물지 않고 실질적인 영향력과 힘을 발휘했다.

밀드레드 베벨의 일기는 앤드루 베벨의 성공 신화를 무너뜨린다. 밀드레드 베벨은 1920년대 미국 당시 주식시장의 허점을 간파하고 남편에게 그 위험성을 경고했다. 하지만 앤드루 베벨은 오히려 그 허점을 이용해 엄청나게 돈을 벌어들였다. 결국 그것 때문에 부부 사이는 냉랭해졌다. 밀드레드는 자신이 주식시장 붕괴에 영향을 끼쳤다고 자책하며 이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다양한 복지 사업을 벌였다. 밀드레드 베벨의 일기는 그녀의 남편 앤드루 베벨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똑똑한 ‘천재 투자자’가 아니라 비도덕적인 ‘투기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밀드레드 베벨의 일기는 앤드루 베벨의 위선과 비도덕성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해럴드 배너의 소설과 일견 비슷하다. 하지만 ‘상상력’의 관점에서 보면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해럴드 배너는 앤드루 베벨이 비도덕적이지만 투자자로서의 재능은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그는 앤드루 베벨이 밀드레드 베벨로부터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고 전혀 상상하지 않았다. 즉 지적 능력 면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뛰어나다는 고정 관념 또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해럴드 배너가 상상하지 못했던 건 밀드레드 베벨의 투자 실력만이 아니다. 밀드레드 베벨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밀드레드 베벨이 정신병으로 고통을 겪었다고 단정했다. 하지만 밀드레드 베벨의 일기에 따르면 그녀는 해럴드 배너의 상상과 달리 정신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암에 걸렸고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였다. 즉 그녀는 가엾고 딱한 존재가 아니라 죽음 앞에서도 끝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은 숭고한 인물이다. 해럴드 배너는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과 편견에 밀드레드 베벨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꿰맞췄다.

다시 말하지만 《트러스트》는 앤드루 베벨과 밀드레드 베벨 부부에 관한 해럴드 배너의 소설, 앤드루 베벨의 미완성 자서전, 그 자서전을 대필한 쓴 아이다 파르텐자의 고백, 그리고 밀드레드 베벨의 일기 등 네 가지 텍스트로 구성돼 있다. 표면적으로 이 작품은 앤드루 베벨과 밀드레드 베벨 부부에 관한 숨겨진 진실을 찾아가는 추리소설 또는 영화처럼 읽힌다. 처음에는 ‘무엇인 진실인가’(What is true?)에 초점을 맞추게 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진실이란 과연 무엇인가’(What is the truth?)라는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전술한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소통할 목적으로 생산한 모든 인공물’이라는 텍스트의 속성을 알고 나면, 텍스트는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소설 《트러스트》는 다층적이고 다양하게 읽힐 수 있다. 특히 밀드레드 베벨의 일기의 마지막 부분은 다층적 독해를 가능하게 한다. 밀드레드 베벨의 일기는 처음에는 일기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녀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되면 일기 형식에서 벗어난다. 이제 독자는 텍스트의 창조자가 누구인지 궁금해 한다. 그리고 그 궁금증은 결국 작가 에르난 디아스에 대한 질문으로 향한다. 즉 독자는 작가에게 의도가 무엇인지, 그가 만들고자 한 텍스트는 무엇인지 질문을 하게 된다.

죽는 순간을 자신의 언어로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실 살아 있는 순간에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 단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을 뿐이다. 화려하고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산 사람조차도 마지막 순간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의 상상력에 맡겨야 한다. 주지하듯 인간의 삶은 자신의 뜻대로 기록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삶은 확정적으로 ‘타자’의 것이다. 타자의 개입과 그의 의도를 통해 또 다른 타자의 시선에 노출되고 전달될 뿐이다. 그럴 때 그 삶은 공동체의 소유물이 된다. 다시 말하지만 ‘한 개인의 삶과 죽음에 관한 텍스트’는 그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그 텍스트를 만들고 향유하는 사람들 모두의 것이다.

타자만이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인식과 성찰을 가능하게 해주고, 의미를 복원하며, 우리로 하여금 고립에서 탈출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타자를 배척하고 혐오할 것이 아니라, 환대로서 맞아야 한다. 철학자 한병철은 《타자의 추방》(2016)에서 한 문명의 발전 정도를 측정하는 기준이 바로 ‘환대’라고 했다. 우리는 타자의 음성을 경청해야 한다. 그럴 때만 우리는 타자를 인식하고, 그럼으로써 우리 자신을 인식하며, 나아가 우리를 구속하는 체제의 틀 자체를 인식해 같은 것의 지옥을 벗어날 수 있다.

윤정용 <문학평론가·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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