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불화하는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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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불화하는 예술
  • 윤정용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4.08.01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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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용
문학평론가
칼럼·독자위원
 

최근 ‘나쁜’이라는 제목이 들어가는 책 두 권을 우연히 읽었다. 아시아문화전당이 기획한 《한국 나쁜 영화 100년: 역사의 기록과 영화의 기억, 이하 나쁜 영화》(2019; 2021)과 김유태가 쓴 《나쁜 책: 금서기행, 이하 나쁜 책》(2023)이다. 일단 ‘나쁜’이라는 단어에 눈이 끌렸다. 예전에 읽었던 강신주·이상용의 《30금 쌍담》(2016)이 떠올랐다.

이 책은 ‘섹스·폭력·정치·종교’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주제별로 논쟁적인 영화를 두고 벌이는 두 저자의 대담으로 구성돼 있다. 그들은 “영화는 재발명돼야 한다”는 말로 대담을 시작했다. <감각의 제국>(오시마 나기사, 1976), <시태태엽 오렌지>(스탠리 큐브릭, 1971), <살로, 소돔의 120일>(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1975), <비리디아나>(루이스 부뉴엘, 1961)에 대해 진하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시험해 보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책을 읽은 뒤 각각의 영화를 찾아봤는데 그때의 충격과 불편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30금 쌍담》에서 다루고 있는 이 영화들은 보통 ‘나쁜영화’로 묶일 수 있다. 그런데 과연 ‘나쁜영화’란 무엇일까? 그리고 ‘나쁜영화’가 있다면 어떤 기준을 가지고 ‘나쁜 영화’라고 할까? 《나쁜 영화》의 ‘추천의 글’을 쓴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말처럼 일반적으로 “‘나쁜’ 영화는 심리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또는 윤리적으로 ‘나쁘다’라는 어떤 판단의 대상의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럴 경우 ‘나쁜’의 반대말은 당연히 ‘좋은’ 또는 ‘착한’이다. 그는 ‘나쁜’의 반대말로 ‘착한’에 주목한다.

《나쁜 영화》는 제목 그대로 ‘나쁜’ 영화들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나쁜’ 영화들은 화폐와 사법의 측면에서 ‘나쁜’ 영화들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착한 영화는 “화폐의 욕망에 거슬리지 않는 영화, 그래서 그 흐름 안에 머물면서 화폐를 기쁘게 만드는 영화”를 가리킨다. 나쁜 영화는 화폐의 욕망을 거절하는 영화다. 나쁜 영화가 그 욕망에 거절하는 이유는 그것이 영화의 욕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폐의 욕망에는 단지 주인과 노예의 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즉 평화로운 공존의 자리가 없다. 하지만 영화의 욕망에는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조화든 불화든 공존이 가능하다.

정성일의 말을 다시 옮기면, 착한 영화는 “모든 사람은 본래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다. 법은 항상 무언가에 의지해서만 자신을 실행한다”고 역설한다. 착한 영화들은 법 안에서 자신의 예술적 자유를 누리고 있고 그때 그 자유는 언제나 그 무언가를 인정하고 그 권위에 복종하고 있다. 나쁜 영화는 바로 그 무언가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자유를 누리기를 원한다. 나쁜 영화는 착한 영화의 반대말이 아니라 반대편에 있는 영화다.

《나쁜 영화》에서 소개되는 영화들은 <미몽>(양주남, 1936)에서부터 <디어 엘리펀트>(이창민, 2019)에 이르기까지 한국영화 100년의 역사를 예거한다. 최초의 한국영화는 시대적 상황과 제작 방식, 상영 방식에 따라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대체로 김도산의 <의리적 구토>(1919)라는 데에 동의한다.

<의리적 구토> 이후 한국영화는 100년 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그 정점이 바로 봉준호의 <기생충>(2019)이다. <기생충>의 화려한 성공으로 피날레를 장식한 한국영화 100주년은 대기업들의 투자 성과와 이를 통해 발전해 온 한국 상업영화들의 진취과정을 돌아보는 해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주류영화와 비주류영화, 상업영화와 비상업영화의 양극화 현상이 심해지고 있는 현실을 애써 외면했던 한 해이기도 했다.

한국영화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유신체제. 5·18민주화운동, 그리고 문화계 블랙리스트 등시대의 질곡을 겪으면서 수많은 저항 영화를 제작했지만, 한편에서는 이러한 영화들을 검열하고 규제하고자 했던 이중의 역사를 갖고 있다. 저항 영화가 보여주는 표현의 자율성과 대안적 형식들이 한국영화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러한 영화의 정치성을 불편해하는 영화인들도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한국영화는 1987년 이전까지 국가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홍보성 영화들이 많이 제작됐다. 보수적인 사회에 대한 비판, 빨치산의 인간적 묘사를 통한 반공주의에 대한 반문, 영화의 예술적 가치에 대한 탐구를 시도했던 영화들에게는 각종 제재와 검열이 뒤따랐다. 박남옥의 <미망인>(1956), 이강천의 <피아골>(1956), 유현목의 <춘몽>(1965)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1970년대 급격한 근대화 과정에 휩싸였던 당시 한국 사회의 일그러진 욕망과 무의식을 예리하게 포착한 김수용의 <야행>(1977)은 검열에 묶여 3년 동안 창고에 있다가 53군데가 잘려 나간 채 개봉됐다.

1990년대 이후 영화 검열이 다소 완화되고 영화산업의 양적 성장이 고도화됐다. 하지만 한국영화는 상업영화와 독립영화의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형식주의와 사실주의 사이의 치열한 고민은 상업영화 내에서 점점 사라져갔으며, 작가로서 감독의 철학과 미학적 고민을 독립영화 안에 담아내는 것은 너무도 비현실적인 투쟁이 됐다. 단적인 예로 장선우의 <나쁜 영화>(1997)와 <거짓말>(1999), 임상수의 <그때 그 사람들>(2005), 김곡의 <고갈>(2008) 등을 들 수 있다.

그 외에도 한국영화는 100년 동안 무수히 많은 ‘나쁜 영화’들을 만들었다. ‘나쁘다’는 것은 곧 ‘저항한다’는 뜻이고, ‘저항한다’는 ‘새롭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새롭다는 중의적인 의미로 쓰인다. 단어 그대로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것을 창작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기존의 것을 새롭게 해석한다는 의미도 있다. 100년 동안 나쁜 영화를 만들어 온 한국영화는 더 나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만든 더 나쁜 영화만이 더 저항적이고 더 새로운 영화가 될 수 있다.

더 저항적이고 더 새롭다는 의미에서의 ‘나쁜’이라는 단어는 《나쁜 책》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이 책의 저자 김유태는 일간신문사 출판 담당 기자다. 그가 하는 일은 배달된 신간 서적 가운데서 “선별해 토요일자 북 섹션, 즉 책 지면에 소개”하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매주 100권에서 150권 가운데 단지 열 권 정도 소개되고 나머지 책들은 버려진다. 그는 그렇게 버려지는 책들을 ‘안전한’ 책들이라고 부른다.

“세상과 불화할 가능성을 애초에 제로로 가정하고 집필된 책은 독자의 정신에 아무런 생채기도 내지 못한다.” 영속적으로 읽히는 책들, 시간이 지나도 회자되는 책들의 문장 사이에 숨어 있는 칼날 같은 진실은 무섭도록 단순하다. 독자를 충격하지 못하면 그 책은 인쇄와 동시에 이미 죽은 책이다.

저자의 말처럼 위험한 책에는 ‘금서’라는 딱지가 붙고 금서 중에서도 정말 위대한 책은 독자의 내면에 끊임없이 싸움을 걸어온다. 독서의 끝자락에서 어지럼증을 일으키는 책만이 불멸의 미래를 약속받는다. 저자는 금서를 “이중적인 드라마”라고 명명한다. 하나는 책 내부에서 벌어지는 첨예한 드라마고, 다른 하나는 이 작품이 독자를 만나기까지 치렀을 과정을 상상할 때 벌어지는 드라마다.

두 세계를 동시에 확인하는 여정은 적어도 정신적으로는 안전하지 못한 행위다. 그러나 금서로 지정되어 손가락질을 당했거나 논란 끝에 사멸될 위험까지 겪었던 벼랑 끝 책들은 오히려 그러한 역사성 때문에 더 큰 가치를 획득한다. 이때 우리가 마주하는 진실 역시 무섭도록 단순하다. 안전하지 못했던 책들이야말로 재생의 가능성을 확보하며 그것은 인간이 책을 사랑하기 시작한 이후의 역사에서 한순간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말이다.

금서라고 하면 대개 고서(古書), 즉 옛날 책을 떠올린다. 하지만 종종 금서는 현재를 향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비엣 타인 응우옌의 《동조자》(2015)와 켄 리우의 《종이동물원》(2016)을 들 수 있다. 베트남계 미국인 작가 비엣 타인 응우옌의 퓰리처상 수상작인 《동조자》는 저자의 고국인 베트남에서 출간되지 못하고 있다. 이를 원작으로 한 HBO 오리지널 드라마 <동조자>(박찬욱, 2024)도 베트남어 대사가 약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데도 반공적인 내용과 공산 통일 이후 재교육수용소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으로 베트남 내에서는 상영이 금지됐다.

중국계 미국인 작가 켄 리우는 역사라는 팩트에 과학적 상상력을 덧댄 소설을 써왔다. 그는 세계 유명 문학상을 휩쓴 젊은 거장으로 통한다. 그의 대표작은 단편소설집 《종이동물원》이다. 표제작인 ‘종이동물원’으로 그는 휴고상, 네뷸러상, 세계환상문학상을 받았다. 《종이동물원》도 2017년 로커스상 최우수 선집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종이동물원》에 실린 작품 가운데 유독 일본 내 출간을 거절당한 작품이 있다. 바로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이다. 이 작품은 “역사학, 법학, 컴퓨터공학을 엮어 1940년 중국 하얼빈의 버려진 공장에서 자행된 731부대의 생체 실험과 그 이후의 논쟁을 가상으로 다룬 작품”이다.

제국주의 일본의 생체 실험을 천재적인 상상력으로 재해석한다. 일본에서는 이 작품만 빠진 채 출간됐다. 중국에서도 그의 작품에 불쾌감을 드러냈다. 켄 리우의 작품은 중국에서 4권 이상 출간됐는데 공산당을 비판한 대목은 삭제된 채 출간됐다. 이렇게 그의 책은 현대적인 금서가 됐다. 《나쁜 책》의 저자는 《동조자》와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을 ‘아시아인들은 못 읽는 책’이라고 명명했다. 그런데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 두 책을 온전히 읽을 수 있다.

표현과 주장에 관해서는 절대적으로 자유롭다고 알려진 미국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1970)은 도서관 금서 지정 요청을 받은 책 3위에 올랐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토니 모리슨은 ‘그야말로 전설’이다. 39세에 쓴 첫 소설로 세계적인 권위의 전미도서상과 퓰리처상을 받았고 23년 후인 62세에 노벨문학상을 목에 걸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쓴 첫 소설이 바로 《가장 푸른 눈》이다. 이 책은 영아 살해, 근친상간, 소아성애를 한 권에 모두 담고 있다.

정체성에 관한 사유로 가득한 이 소설은 슬럼가에 방치한 흑인 아이들이 처한 비극을 다루고 있다. 소설의 제목인 ‘가장 푸른 눈’은 백인의 상징입니다. 학대를 당하는 두 흑인 소녀는 푸른 눈동자를 가질 수만 있다면 모든 어른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신에게 가장 푸른 눈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절망의 씨앗은 도둑처럼 찾아와 생의 척박한 당에 심어져 모든 풍경을 망쳐버린다. 모리슨의 문학적 영예 이면에서 이 작품을 둘러싼 논쟁은 미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책의 자유로운 유통과 표현의 자유를 믿고 따르는 미국 도서관은 금서 지정 요청 때문에 사회적 논란을 겪고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가운데 적잖은 인물들이 금서 또는 논쟁적인 작품을 출간했다. 카밀로 호세 셀라, 나지브 마흐푸즈, 밀란 쿤데라, 이스마일 카다레, 니코스 카잔차키스, 필립 로스, 주제 사라마구, 옌롄커 등 노벨문학상을 받았거나 받고도 남을만한 작가들의 책은 한때 금서였거나 지금도 금서다.

셀라의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1942), 쿤데라의 《농담》(1967), 카다레의 《피라미드》(1992), 로스의 《포트토이의 불평》(1969),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1953), 사라마구의 《1991》, 옌롄커의 《당씨 마을의 꿈》(2005) 등이다. 이 책들은 각각 친족 살해, 독재 비판, 성(性)의 일탈, 신성 모독, 에이즈 집단 감염 등의 이유로 금서 목록에 올랐다. 심지어 옌롄커의 경우에는 책을 출간한 출판사가 작가를 직접 고소했다.

금서는 세상이 온통 뿌연 때에 뜻밖에 색조를 띠며 세상의 불온함을 고발하는 ‘초월적 문장의 합’이었다. 금서라는 나침반이 가리키는 불화의 방향은 소수의 권력자가 탈취한 이념이었다. 금서의 작가들은 복종하지 않음으로써 세계와 독자에게 자유를 선물하고자 했다. 독자는 문장으로 적힌 지옥의 창문을 열어보면서 자유의 물결 속에 자신을 위치시킬 수 있다. 편협한 생각, 작가에 대한 권능자의 질투와 조바심이 금서를 만든다. 금서의 작가는 현실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힘썼던 초극적인 존재들이다.

그들은 안전하지 못한 책으로 안전한 사회를 만들었다. 금서를 읽는 것은 잊힐 뻔했던 인류의 가치와 미래 지향적인 진의를 제자리에 위치시키는 독자적 행위다. 독자는 망각의 물결에서 의식적으로 책의 불온함을 제거해 준다. 이 위대한 일은 독자만이 해낼 수 있는 과업이다. 위험한 책이 모두 위대한 책은 아니다. 하지만 안전한 책만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우위에 서서 교훈처럼 자신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꼭 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영화, 더 나아가 예술 전반에 걸쳐 유효한 금언(金言)이다. ‘위험한 영화가 모두 위대한 영화인 것은 아니지만, 안전한 영화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우위에 써 교훈처럼 자신을 주장해서도 안 된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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