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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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소묘
  • 정규준
  • 승인 2015.12.24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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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겨울은 하얀 융단을 깔아놓은 동화 속 나라였다. 사람들은 햇곡식을 먹으며 풍요와 안식을 꿈꾸고, 세상은 태고의 전설을 준비하였다. 겨울 산, 하얀 병풍 위로 나목의 열병식이 시작되면, 잿빛 산토끼는 몸을 감출 수 없었다. 이때쯤이면 아이들은 토끼원정대를 조직해 산으로 갔다. 산등성이에 그물을 치고 밑에서부터 함성을 지르며 올라가면, 굴에서 잠을 자던 토끼가 놀라 눈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산등성이로 도망쳐 온 토끼가 그물에 걸려든다. 방어용 레이더인 긴 귀가, 목숨을 위협하는 무기가 된 아이러니다. “끼깅!, 죽음의 공포 앞에 선 여린 생명의 본능적 항거. 오로지 도망가는 것 밖에 목숨을 부지할 방법이 없는 연약한 피조물을 불쌍히 여기소서. 발등으로 기어드는 무력자의 비굴함은 관용을 자극하는 필살의 비수! 나는 몽둥이를 든 친구의 발을 걸어 토끼에게 도망갈 시간을 주었다.

출생 중 어미를 잃은 새끼염소를 엄니가 안고 왔다. 우리 집 재롱이라는 뜻의 ‘우롱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보배처럼 키웠다. 이름값 하려는지 녹두방정 떠는 우롱이는, 어느덧 어미 염소의 심장을 닮아가는 나의 가슴팍으로 자꾸만 파고들었다. 눈이 많이 내린 추운 날이었다. 아궁이 속 장작불의 시뻘건 잔해를 뒤로 밀고, 우롱이를 아궁이에 넣었다. 그리고 입구를 나무판으로 막고 고무래로 고정시킨 채 밖에 나가 친구들과 놀았다. 추운 날씨에 돌아다니다가 감기 들지 말라는 어린 마음의 애틋한 배려였다. 돌아와서 아궁이를 열었을 때, 발버둥쳐 살이 벗겨지고 뼈가 드러난 우롱이의 처참한 몰골이 거기 있었다. 동물병원으로, 약방으로 뛰어다녔다. 감동적으로 살아나는 것 같던 우롱이는 며칠 후 맥없이 가버렸다. 나는 우롱이를 가슴 속 만년설에 묻었다. 우롱이는 감성의 산실에 다시 태어났다.

사돈에 팔촌뻘 되는 친척 형이 집에 찾아왔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출신에 약간 저능아인 형은, 도벽이 심해 절도전과 3범으로 복역하다가 출소해 인사를 온 것이다. 아버지는 갈 곳 없는 형한테 일자리가 생길 때까지 우리 집에서 일꾼으로 살라고 은혜를 베풀었다. 당시 집에는 고교생인 형이 읍내까지 이십여 리를 통학하도록 새로 사 준 자전거가 있었다. 자전거를 바라보는 친척 형의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다음 날, 자전거도 친척 형도 사라지고 없었다. 경찰에 신고했더니, 밤새 내린 눈 위에 나 있는 자전거 자국을 추적하여 인근 국도에서 친척 형을 검거하였다. 아버지는 형을 용서하였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를 왜 용서하느냐고 사람들이 물으니 눈(雪) 때문이라고 했다. 눈은 은원(恩怨)의 연금술사였다.

정월 대보름날은 건너편 동네와 개울을 경계로 쥐불놀이 싸움을 하였다. 쥐불 깡통을 개울 너머로 던지며 해묵은 감정들을 씻어냈다. 눈이 하얗게 쌓인 밤, 교교한 달빛 아래 불덩이들이 허공을 가로지르니 흡사 혼불들의 축제에 온 것 같았다. 골목대장 동네 형이 있었다. 형이 던진 깡통이 아뿔싸, 건너편 소녀의 얼굴에 맞았다. 소녀는 화상을 입었고 소녀의 부모는 내 딸 책임지라 하며 난리를 쳤다. 어쩔 수 없이 형의 부모는 형과 소녀를 정혼시키고 마무리 하였다. 형한테 걱정되지 않느냐고 물으니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 형은 상경하여 사업에 성공하여 돈을 많이 벌었다. 그리고 가문 좋은 서울 여자와 결혼을 하였다. 소녀의 부모가 고소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형은 공소시효가 지나서 문제될 것 없다 하며 알아서 하라고 했다. 소녀와 부모는 울면서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다 한다.

눈 내리지 않는 겨울이 길어지고 있다. 나에겐 꿈이 하나 있다. 이담에 죽으면 옥황상제가 되어 겨울을 눈으로 가득 찬 계절로 만드는 것이다. 겨우내 은총처럼 눈이 내리고, 도로와 비닐하우스에는 열선을 깔아 피해가 없도록 하리라. 온 대지가 하얗게 덮여, 꿈과 이야기로 충만한 세상을 만들리라.
세상이 깊이 잠들어 있는 태곳적 밤을 기나긴 전설처럼 내리는 눈은 천상의 이야기와 절대 존재와의 사귐을 꿈꾸게 한다. 가로등 불빛 아래 천녀의 신비로운 하강을 바라보면서 순수로 돌아가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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