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춥고 음산한 날씨이긴 하지만 다행이 오늘은 금요일이어서 오후의 강의가 없는 날이다.
“저녁 식사하러 명동에라도 나갈까?”
소영이는 연숙이를 꾀었다.
“너도 요즘엔 아주 궁해졌나 보지? 강의가 없는 오후인데도 모처럼 함께 놀러갈 흔해 빠진 남자 녀석 하나 없으니……”
연숙이는 소영이를 건드렸다.
“그래 사내 녀석들 도무지 시시해서……”
“어이쿠! 제법인데……”
“잔소리 말고 뭐 좀 먹으러 가자. 잘 아는 집 없어?”
“하기야 넌 걱정이라든가 궁색 떠는 따위는 모르는 아이니까……”
입씨름 끝에 두 사람은 4시경 명동으로 나갔다. 소영이의 숙모가 그 곳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그곳 지리에는 밝았다. 명동 중국 대사관 앞 거리의 중국음식점들 중에서 싸고 맛있고 양도 푸짐한 집을 소영이는 잘 알고 있었다.
점심을 걸렀으므로 둘이는 중국집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나와 차가운 진눈개비 속을 어슬렁거리며 걸어 시내 한 복판으로 나갔다.
“한 잔 안 할래?”
소영이가 불쑥 술 얘기를 꺼냈다.
“이왕이면 외국인들이 잘 가는 술집으로 가자꾸나.”
“너 간덩어리 부었니?”
그러나 연숙이는 완강하게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는 않았다. 소영이와 연숙이는 우산 하나를 받쳐 들고 <씨걸>이라는 술집의 문 앞에 이르렀다. 그리고 서슴없이 문을 밀고 들어갔다.
홀 안은 담배 연기로 가득차 시야가 흐렸다. 궐련의 달콤한 향기도 섞여 흐르고 있었다. 그녀들은 잔뜩 기가 눌려 카운터 쪽 테이블로가 자리를 잡고 앉아 외국에라도 온 듯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두리번 거렸다.
소영이는 바아 스탠드의 뒤쪽 술병들을 진열해 놓은 선반의 거울에서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듯한 사나이의 얼굴에 시선을 멈추었다.
그 사나이는 40세 남짓한 외국인으로서, 커다란 매부리코와 얼굴에 군살이 많아 주름이 두드러져 보이는 어딘가 완강한 느낌을 주는 뺨을 하고 있었다. 그는 턱까지 올라오는 목스웨터 위에 양복을 걸치고 울적한 듯이 등허리를 구부정히 하고 앉아 스트레이트로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는데 소영이는 그가 마도로스라는 것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것은 1년 전쯤의 일이었다. 소영이는 숙모를 따라 중국 대사관앞 거리로 중화요리를 먹으러 간 적이 있었다. 요리집은 꽤 혼잡해서 두 사람은 구석진 테이블에서 딴 손님들과 한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 때의 이 사나이는 소매 끝에 금줄이 붙은 감색의 마도로스 제복을 단정히 입고 혼자 고량주를 마시면서 주위의 손님들을 흘깃흘깃 쳐다보며 앉아 있었다. 이 사나이는 중국말에 제법 능통해 있었는데 그가 흘깃흘깃 시선을 던지고 있었던 것은 말상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궁상맞은 중국 사나이가 한 명 들어와 그 마도로스의 앞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제법 날씨가 풀렸군요.”
파란 눈에 속눈썹조차 갈색인 이 외국인이 뜻밖에 중국어로 말을 걸어오자 중국 사나이는 깜짝 놀란 듯이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외국인으로부터 ‘고량주 한 잔 드시겠어요’ 하는 소리를 듣자 이내 입이 함지박만큼 잔뜩 벌어지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두 사나이는 웃고 마시면서 얘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취기와 더불어 말소리의 톤이 점점 높아 갔다. 마르세이유·함부르크·발리섬 등 매혹적인 외국지명들도 튀어 나왔다. 그 외국인은 기분좋게 흥이 오르는지, 아니면 그가 거쳐 다닌 항구의 추억들이 되살아 나는지 콧노래를 흥얼대기도 했다. 그 광경이 너무 흥겹게 보였던지 숙모는 무의식 중에 그들에게 흘려 귀를 기울이는 듯 했다.
“저 콧날하고 눈이 인상적이구나! ”
숙모는 이런 말도 했다. 그녀는 5년 전에 남편과 사별하고 독신으로 혼자 살고 있는 터였다. 이제 나이가 오십이 다 들어가는데도 명랑하고 상냥스러운 성격 탓인지 별로 주름살이 없고 서른 조금 넘은 나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숙모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으므로 한 때는 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른 일도 있었다.
중국인 사나이는,
“어떠쇼? 저 여자 쓸만하죠?”
라는 둥,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농담을 하기도 했다.
30분쯤 후 그가 머리를 숙여 가며 잘 먹었다는 인사를 하고 자신이 사겠다고 한 술값을 내 놓고 돌아가려고 했을 때 이미 기분이 잔뜩 좋아진 외국인 마도로스는 그 돈을 궁상맞은 중국 사나이의 주머니 속에 도로 집어넣어 주었다.
“염려 마쇼! 내가 낼 테니까……”
마도로스가 선심을 썼다.
그 때 소영이가 속삭였다.
“숙모! 아까 저 테이블로 가 앉았더라면 좋았을 걸……노래도 듣고 한턱 얻어먹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예요.”
“지금도 늦진 않지.”
소영이와 숙모는 이제 먹던 접시를 들고 주책스럽게 그 테이블로 옮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잔뜩 흥이 올라 밝은 표정으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그 사나이를 그냥 바라보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그 때 그 외국인 마도로스 사나이가 지금 이 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다.
“얘, 저기 저 구석에 앉아 있는 외국인 아저씨하고 친구할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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