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크림과 세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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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크림과 세계지도
  • 김상구 칼럼위원
  • 승인 2017.11.01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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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 때 문장가 유한준(兪漢雋, 1732-1811)의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되게 보게 되며, 볼 줄 알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그저 쌓아두는 것과 다르다”라는 말을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로 ‘패러디’ 하고 있다. 알고 본다 하더라도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의 관점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사물에 대한 인식은 달라질 수 있다. 잘못된 기존의 관점으로 채색된 역사를 받아들이는 것은 기존의 허구적 이데올로기를 수용할 뿐이다. 독일의 역사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의 눈빛으로 역사(과거, 유적, 예술품 등)를 본다는 것은 기존의 역사에서 놓치고 있는 것을 읽어내는 것이고, 역사의 결을 거꾸로 더듬어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 역사가 갖고 있는 허구적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는 ‘아우라(Aura)’를 해체해 보는 것이다.

지난 여름방학 중 이런 생각을 조금 챙겨서, 동유럽의 유적들과 성당을 둘러보다 점점 그 시간이 짧아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유럽의 역사를 더 잘 알았더라면 성당의 창문들조차 의미 있게 다가왔을 텐데, 그 성당이 그 성당처럼 비슷비슷해 보였다. 단순한 성당의 순례가 여행을 지치게 했다. 어느 성당에서는 성당 마당가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에 마음이 가 있기도 했다.

이러한 마음은 20여 년 전 서유럽에 갔었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때나 지금이나 유럽여행 중 빼놓지 않는 일정은 박물관을 방문하는 것이다. 일행 중 몇몇은 비슷한 것을 뭐 볼게 있느냐며 아예 박물관 바깥에서 끽연(喫煙)으로 관람을 대신하기도 했다. 많은 비용을 지불한 터라 그 당시 어처구니없어 보이기도 했지만, 관람객에 떠밀려 눈을 반쯤감고 돌아다녔을 것을 생각하니 오히려 그 모습이 연민(憐愍)으로 다가온다. 이번 여행도 사전에 철저히 준비 했었더라면 유익한 여행이 됐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은 벤야민의 말처럼 기존의 역사를 폭 넓게 알아야 예술품의 허구적 아우라도 해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 중, 어느 호텔에서 방을 배정받기 위해 잠시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벽에 걸린 세계지도가 눈으로 들어 왔다. 그런데 이 지도는 늘 한국에서 보던 세계전도(동남아시아가 지도의 가운데에 있고, 오른쪽은 일본과 태평양, 미국이 있는 지도)가 아니라 유럽이 가운데에 있고 지도의 오른쪽 끝에 한국과 일본이 있었다. 이 지도에서는 유럽이 품고 있는 바다가 지구의 중심이 되는 지중해(地中海)이고, 우리는 동쪽의 끝 ‘극동 아시아(far east)’가 아닌가! 이것은 유럽중심의 지도였다.

유럽중심의 지도를 따라 오른쪽으로 생각을 옮겨 보았다. 아편전쟁 후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의 시스템들이 세계의 보편적 체계로 자리 잡고, 동양의 오랜 전통은 무너져 갔다. 소위 쇄국정책을 풀고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은 자신들의 문화를 동양에 비해 비교우위에 놓았다. 헤겔은 ‘역사철학강의’에서 중국은 백성들에게 자유를 허용하지 않고 황제 중심으로 나라를 경영하고 있으니, 나라다운 나라가 될 수 없다고 무시했었다. 헤겔의 무시를 지금 다시 무시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이제 중국은 G2로 급성장했다. 그러면 지금 중국은 물질적 풍요에 걸 맞는 고양된 문화를 갖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몽상의 눈빛이 지도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독일의 역사학자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의 말처럼 역사란 ‘시간적으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모든 과거 사건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역사적 사실들은 역사가가 그것을 불러 낼 때 만 말을 한다(E, H, 카).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은 역사적 사실들에 발언권을 부여하며 과거와 대화를 나눌 수 있기 위해서는 과거의 사실들을 잘 알아야 한다. 역사를 알지 못하면 여행도 재미없고, 아이스크림 가게를 서성일 뿐이다.

과거를 잘 알아야 현실도 각성하게 되고 미래도 비춰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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