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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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 유선자 <수필가>
  • 승인 2018.02.22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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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푸른 하늘을 쳐다보면서 시원하게 깊은 숨을 몰아 내 봅니다. 마치 뭔가를 훌훌 털어 버리고 처음으로 하늘을 보듯 맑습니다. 가뿐하게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나목이 되어 입김을 불면서 걸어 보는 우수雨水의 아침. 바람은 나목의 가냘픈 가지사이로 호흡을 남긴 채 잠시 휘둘러 나가나 봅니다. 어느새 나뭇가지에 까치 두 마리가 날아와 앉습니다. 그저 멍하니 하늘을 보다 자신의 가지만 남은 몸체를 보면서 남은 것 하나 없는 허전함보다는, 한 잎도 거친 것 없는 후련함에 나목은 스스로 놀라 자신을 바라봅니다.

설기설기 여름날 나뭇잎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가지 사이로 커다란 새 둥지가 뚜렷하게 보입니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형체를 만들어 낸 나무 가지의 운집(雲集)은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행성 같습니다. 커다란 수레바퀴 모양으로 당장 하늘을 마당삼아 굴러 갈 것도 같습니다. 다가가 가만히 기대서면 푸른 정맥의 펌프 소리가 ‘쿵쿵!’ 가슴 저미지만 힘이 있습니다. 이 추운 벌판에 곧추 세운 가지가 커가는 아이들 자존심만큼 단단하게 솟구치며 호숫가에 머리를 세우고 있습니다. 생명의 순환을 위해서 자연의 섭리 따라 순응하고 있는 나목이 대견하기까지 합니다. 아침이면 눈을 들어 태양의 빛을 가슴에 품어 두었다 신선한 공기를 만들어 봄을 준비하는 모양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조용히 봄을 맞이하는 모습은 갓 시집 온 새댁 같기도 합니다.

어느 날 너무 추울 때는 나목이고자 원하지 않았지만 온전히 다 내려놓은 자신을 보고 위로 받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24절기 속에 새 순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자연의 순리 따라 사는 일 자체가 가장 어렵고도 평범하지만 그 자체가 존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옆 나무는 인내로 만들어진 옹이도 여러 개 보였습니다. 나의 나무 가지에는 굵은 옹이는 없지만 그물망 같은 까치집에 새끼가 태어나 곱게 울어줍니다. 까치가 보잘 것 없지만 나의 나뭇가지에 집을 지어 주었기에 칠흑의 밤 심장소리를 가장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는 행복이 있었습니다.

나무는 나무이고 새는 새일 수밖에 없는 생명 있는 존재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빈 가슴으로 혹한에 떨어 보았느냐 묻지 않습니다. 함부로 빈 운동장에 겨울 휘파람 소리로 고독을 흉내 내지 않습니다. 껴안을수록 부서지는 나목의 가지들을 보면서 그 무엇도 나목의 삶으로 살은 적 없다면 나목의 아픔에 대해 말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 같습니다. 한 겨울 밤 “네가 나목의 삶에 만족하느냐” 신(神)이 묻기를 기다릴 때도 있었습니다. 신의 묵언은 ‘너는 끝까지 팔을 올리고 있으라’는 명령 같았습니다. 팔을 한번만 내릴 수 있다면, 마음대로 움직일 수만 있다면 이 지상의 역사는 다시 쓰여 질 것임이 틀림없을 것 같았습니다.

겨울 나목은 제게 많은 물음을 주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잎이 가득 피어 앙상한 가지를 가려줄 시간을 기다리는 나목을 보면서 봄과 통(通)할 수 있는 맥을 엿 보고 싶습니다. 겨울나목을 좋아합니다. 나목에게서 나 스스로 목숨을 유지하는 강인함을 배웁니다. 나목에게서 스스로 목마르지 않기 위해서는 한 겨울에 땅속에서 적당한 물만 흡수하는 지혜를 배웁니다. 많은 것 보다 부족한 것 같아도 적당한 것이 쾌적하다는 것도 배웁니다. 나목에게서 스스로 목숨을 소중히 하는 일은 나를 존재하게 한 부모님과 나를 바라보는 자식을 위해서 열심히 동맥을 돌리는 일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때로 힘들겠지만 나목으로 서 있는 당신, 솔직함과 당당함, 세상의 그 어떤 것 보다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나뭇가지가 부서질까 껴안지 못하지만 다가서지 못함을 용서하기 바랍니다. 삭풍의 끝, 온 몸으로 견뎌 생명을 지키는 당신 스스로 사랑이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나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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