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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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Queen)
  • 조남민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8.12.20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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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미련스럽게 가지고 있는 1200여장의 레코드판 중에 그룹 ‘퀸(Queen)’의 앨범을 세어보니 모두 9장이다. 그중 손때 묻은 한 장을 턴테이블에 올려 다시 틀어보니 퀸의 신보가 나올 때마다 동네 음악사에서 마음 설레며 사들이던 그 열정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다. 난해한 가사에 정신없는 연주, 그리고 4옥타브를 넘나드는 프레디 머큐리의 놀라운 보컬에 흠뻑 매료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집안 어딘가에 꽂혀있을 ‘브라이언 메이 주법’ 책만 찾으면 예전의 그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이 들것만 같다. 

최근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개봉과 함께 록밴드 ’퀸‘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퀸은 1971년 영국에서 결성돼 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45세의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약 20여 년간 활동해온 전설적인 록 그룹이다. 프로그레시브 록, 글램 록, 하드 록 등 다양한 장르의 록 음악을 구현하며 영국 및 전 세계의 음악 발전에 기여했고, 뮤직비디오의 대중화에도 앞장섰으며, 역사상 최대의 공연으로 일컬어지는 ‘라이브 에이드’(live aid, 에티오피아 난민의 기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금마련의 대규모 공연으로 1985년 7월 13일 영국 런던에서 시작해 미국 필라델피아까지 장장 16시간 동안 진행된 실시간 위성 텔레비전 중계방송. 영국 공연에는 22팀, 미국 공연에는 35팀이 참가했고, 전 세계 100여개 국가에서 19억 명 가량이 시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공연을 통해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아프리카 태생이지만 어린 시절 영국으로 이주해 다양한 예술적 감각을 키워온 프레디 머큐리는 그룹 ‘퀸’의 보컬이자 핵심이었다. 천재적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와 베이시스트 ‘존 디콘’, 드러머인 ‘로저 테일러’ 모두 작곡에도 능한 훌륭한 뮤지션이었지만 메인은 프레디다. 특히 가사와 장르의 톡특함은 당시로서는 물론 지금도 무척 난해한 부분이 많다. ‘후루시초프와 케네디의 갈등을 단숨에 해결해 내지’(killer queen), ‘엄마, 방금 사람을 죽였어요, 그의 머리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겼어요’ (bohemian rhapsody) 등등 상상하기도 어려운 가사들을 그의 노래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곡도 마찬가지다. 세곡을 동시에 쓰다가 합쳐서 탄생된 보헤미안 랩소디는 팝과 클래식, 오페라의 장르를 아무렇게나 넘나들고 있기에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구조의 노래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노래가 살아남아 여태까지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은 이를 예술로 이해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다양한 문화예술에 대한 열린 마음이 기저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국은 전통적으로 자유분방한 록의 정신에 관대한 나라다. 이런 기반 속에 비틀즈, 롤링 스톤즈, 레드 제플린, 핑크 플로이드, 딥 퍼플, 블랙 사바스, 주다스 프리스트 등 수 많은 전설적인 록 그룹이 태어나고 상호 교감했던 것이다. 

퀸의 바람은 우리나라에도 불어왔다. 그룹 푸른하늘의 유영석은 퀸의 대표적 광팬으로 퀸의 분위기와 비슷한 곡을 많이 만들었고, 록 그룹 블랙홀과 가수 김종서는 라이브 무대에서 퀸의 노래를 자주 불렀으며, 플라워의 고성진이나 자우림, K2 김성면도 마찬가지였다. 고인이 된 신해철은 퀸을 자주 흉내 냈고, 김경호는 프레디의 추모 노래까지 만들었으며, 심지어 싸이는 브라이언 메이와 함께 음반 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사실 퀸의 가장 큰 매력은 프레디 머큐리의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살아있는 라이브 무대다. 프레디는 돈을 쓰며 공연장에 오는 팬들에게 감사할 줄 알았고 항상 새로운 것을 보여주려 애썼다. 진정한 가수가 설 자리는 무대라는 것은 알았을 테지만 죽고 나서 더 유명해질 줄은 아마 몰랐을 것이다.

조남민 <홍성문화원 사무국장·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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