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로 몰려 죽은 아버지, 아들은 교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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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로 몰려 죽은 아버지, 아들은 교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 박만순 오마이뉴스 기자
  • 승인 2021.07.02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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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서울시교육위원장 최홍이의 가족사… 보도연맹사건과 아버지 최원복
최원복(최홍이의 부친).

최홍이는 33년 교직생활을 한 고교 교사 출신으로 지난 2010년 서울시의회 교육의원으로 당선된 이후 세 번의 교육위원에 당선됐고, 서울시교육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소설가 신경숙의 은사로도 잘 알려졌다. 최홍이도 소설가 신경숙을 애제자로 아낀다고 한다. 국어교사 최홍이와 소설가 신경숙의 숙명적인 만남은 최홍이가 영등포여자고등학교 산업체특별학급 담임을 맡으면서다.

최홍이는 1969년 공주교대를 졸업한 후 같은 해 중등교원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이후 중등학교 3곳을 거쳐 1979년 영등포여자고등학교에 부임했다. 당시 영등포여고 교장은 “최 선생은 서울대도 안 나왔잖아요, 4년제 정규대학도 못 나왔으니 야간반을 맡으라”고 했다. 최홍이는 “당시는 야속했지만 열의를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쳤다”며 “야간반을 맡지 않았더라면 신경숙이라는 인재를 만날 수 없었겠죠”라며 진주를 찾은 인연을 회상했다. 그러면서 최홍이는 “경숙이뿐 아니라 그 시절 만났던 제자들은 모두 시대를 함께 나눈 분신 혹은 동료 같은 존재”라고 표현했다.

1979년 야간반인 영등포여고 산업체특별학급에 다니던 신경숙은 주간반 학생과의 오해로 1주일 동안 무단결석을 했다. 이 일로 담임교사인 최홍이로부터 신경숙은 반성문을 써오라는 벌을 받았다. 이때 신경숙은 대학노트에 20쪽이 넘도록 자신의 이야기를 썼다. 반성문 대신 이 글을 읽은 담임 최홍이는 신경숙에게 오히려 “소설을 써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어떤 얘기라도 좋으니 네 얘기를 써 봐라. 뭘 하든 네가 하고 싶은 걸 하거라. 대신 학교는 빠지지 말라”고 당부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작가 신경숙과 담임을 맡았던 국어교사 최홍이의 아름다운 사제(師弟) 스토리와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소설가 신경숙은 그의 장편 ‘외딴방’에서 이러한 사실을 밝힌다. 신경숙의 ‘외딴방’은 서울로 올라와 외딴방에 살며 구로공단 전자부품회사에 다니던 10대 소녀의 젊은 날을 그린 자전소설이다. 작품 속 ‘나’는 공장에 다닌 지 1년 만에 산업체야간학교에 입학하지만 주산·부기 위주의 커리큘럼에 흥미를 잃고 방황한다. 그때 ‘나’를 붙잡아준 이는 최홍이 국어교사다. ‘나’의 글재주를 눈여겨본 그는 “주산은 안 놓아도 된다”며 평론이나 시 보다는 소설 쓰기를 권한다. 이후 ‘나’는 최홍이 교사가 건넨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필사하며 소설 습작에 들어간다. 야학은 신경숙을 소설가로 만든 ‘인큐베이터’였던 것이다. 경제개발시기였던 1970~80년대는 ‘야학의 시대’였다. 당시 야학은 가난에 학업을 놓친 사람들을 위한 배움의 충전소였던 것이다.

신경숙은 자전소설 ‘외딴방’에 ‘최홍이 선생이 소설 대신 시를 써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했으면 나는 시인을 꿈꾸었을 것이다. 소설은 그렇게 내게로 왔다’고 썼다.

소설가 신경숙은 ‘엄마를 부탁해’ 이후 최근 8년 만의 신작 장편 소설 ‘아버지에게 갔었어’가 출판사 창비에서 출간돼 미국 아스트라출판사와 번역 출간 계약을 맺었다고 전했다. 신경숙 소설이 미국에서 출간되는 것은 2011년 4월 ‘엄마를 부탁해(영문판 제목은 Please Look After Mom)’ 이후 10년 만이다.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보도연맹?
“계세요.” “누구세요?” 자신을 충남 논산군 양촌지서장이라고 밝힌 그는 대뜸 “영감님, 축하드립니다”라고 했다. “예?” 하며 얼떨떨해 하는 그에게 지서장은 전보를 내밀었다. ‘고시합격 급(急) 상경요망’

당시 초등학교 교사였던 최홍이는 그해 중등교원 시험에서 합격했는데, 그 소식을 전하면서 ‘고시 합격’이라고 전보를 친 것이다. 당시에는 (사법)고시 합격자를 ‘영감님’이라고 불렀고, 이런 연유로 지서장이 직접 전보를 갖고 오기까지 했다.

지서장이 최홍이에게 ‘영감님’이라 부른 것은 한 편의 코미디였다. 하지만 최홍이가 중등교원 시험에 합격한 것은 ‘인생역전’에 더 가까웠다.

최홍이의 아버지 최원복(1908년생)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 관련으로 홍성군 홍성공업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이후 최원복은 만주와 북조선을 오가다가 흥남 알루미늄공장에 취직했다.

하지만 해방 후 남조선 출신자에 대한 차별이 심해지자 1946년에 월남을 했다. 고향인 홍성군 구항면에서 최원복은 지역 명사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1949년에 국민보도연맹이 만들어지자 그는 강제 가입해야 했다.

하지만 최원복은 좌익 활동을 한 적이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후해 좌·우익이 대립할 때 그는 언제나 좌·우 합작을 주장했다. 좌파 후배들에게 “싸우지 마라. 관공서 습격하지 마라”고 타일렀던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에게는 좌·우 합작론자도 ‘빨갱이’로 취급되었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최원복은 구항지서로 연행되었고, 1950년 7월 11일 광천읍 담산리 폐광 근처에서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다.

최원복의 죽음으로 가족의 고통과 수십 년간 이어졌다. 최원복의 아내 전감예는 홍성과 광천의 장날마다 고추를 내다 팔았다. 장까지는 5~8km 걸렸는데 집에서 걸어서 갔다.

큰딸 최옥래는 경기도 파주에서 군복 수선하는 가게를 차렸다. 옥래 동생 혜자와 윤숙은 통신강의록으로 공부를 하는 한편 언니 가게에서 일하기도 했다. 혜자는 미군과 결혼해 1965년경 미국으로 갔다. 혼인신고를 하고 미국으로 가는 것이기에 신원조회에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윤숙이 1970년에 취업이민을 갈 때는 신원조회에 걸렸다. 결국 ‘반한(反韓)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나서야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최홍이는 홍성군 홍성중학교 2학년 때 신체검사에서 몸무게가 28kg이 나왔다. 영양부족이었다. 그의 집안은 도시락을 쌀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당시는 키 순서대로 번호를 매겼는데 최홍이는 중학교 3년 내내 1번을 도맡았다.

이후 어렵사리 들어간 홍성고등학교는 6년 만에야 졸업했다. 고등학교 입학금을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최홍이는 용기를 내어 고등학교 서무과장(현재의 행정실장)에게 사정했다. “두 달만 봐주세요.” 그가 어렵사리 돈을 장만해 두 달 후 학교를 찾아갔을 때, 이미 반 편성에서 최홍이는 제외된 상태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1964년도에 논산훈련소에 입대했다. 학력과 ‘빽’이 없었던 그는 춘천 수송대로 배치되었다. 이후 제9범죄수사대(CID)로 가게 된 최홍이는 신원조회에 걸려 비밀인가 취급이 불허되었다. “행정과장님 저 일반 보병으로 갈랍니다” “최홍이, 네 잘못이 아니잖아”라며 만류했다. 최홍이의 아버지가 6·25한국전쟁 때 보도연맹사건으로 죽은 것에 대해, 군 행정과장이 “네 잘못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제대 후 최홍이는 ‘대한민국에서 신원조회를 하지 않는 곳은 어디일까’를 고심하다가 결국 ‘교직’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1966년 가을부터 친구들에게 고등학교 책을 빌려 공부를 시작했다. 4개월 만인 1967년 1월에 치른 공주교대 시험에서 5: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을 했다.

1969년도 논산군 양촌면 동산초등학교 첫 발령을 받은 그는 그해 말 중등교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니 고등학교를 6년 만에 졸업하고 공주교대도 어렵게 다닌 그가 중등교원 시험에 합격한 것은 ‘인생역전’이라 할 만한 했다.
 

∎서울시 교육위원을 세 번 하다
최홍이의 교직 생활은 ‘비상식’과의 투쟁, 그 자체였다. 그는 첫 발령지인 논산군 양촌면 동산초등학교 재직 시절 월급명세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 도서 구입비가 1700원이라고 쓰여 있는 게 아닌가. 월급 1만 2000원 받던 1969년도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해보니 충남교육청과 논산교육청에서 ‘어린이 자유(중앙정보부 발간)’와 ‘어깨동무(육영재단 발간)’를 강매한 것이었다. 교사들에게 무조건 나눠준 것이 ‘도서구입비’로 둔갑했다.

최홍이는 이 같은 사실을 ‘동아일보’에 제보했고, 사회면 기사로 보도되자 교육청에서 난리가 났다. 논산교육장이 “낙도(落島)로 보내겠다”고 협박했지만, 그는 오히려 충남교육청 학무과장에게 항의했다.

교직사회 내 부정과 부조리에 그는 눈을 감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1989년 전교조가 만들어질 때 후배교사들이 함께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당한 가족사 때문에 함께하지 못했다.

2002년도에 교육위원이 신설되자 출마하라고 후배 교사들의 성화가 자못 컸다. 교육개혁을 향한 의지가 큰 강물이 되어 사회에 물결칠 때였다. 그는 2002년부터 2014년까지 서울에서 교육위원을 세 번 했다. 12년간의 교육위원을 수행한 최홍이(1942년생, 충남 공주시 사곡면 유등리)는 아버지 사건의 명예회복을 위해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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