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 장군과 만해 선사의 묘소 ‘환향(還鄕)’을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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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장군과 만해 선사의 묘소 ‘환향(還鄕)’을 바라며
  • 홍주사람 홍암 이상선
  • 승인 2021.07.10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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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배객들 “홍성에는 생가만 있고 묘소는 없다고…?”

‘충절의 고장’으로 불리는 홍성(본래 지명은 홍주)은 청산리대첩의 주역이었던 백야 김좌진(1889~1930) 장군과 시인이자 승려로 3·1만세운동 민족대표였던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사의 고향이다. 두 분 모두 한국의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우리 고장의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 이시다.

백야 생가지는 서해안고속도로 홍성나들목에서 불과 5분 거리인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 있다. 생가지는 복원돼 잘 정비돼 있으며, 기념관에는 그의 출생부터 독립운동·암살·훈장추서 등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기록과 자료도 잘 전시돼 있다. 백야는 열다섯 살 때 집안의 노비를 해방시킨 일화로도 유명하다.

만해 한용운 선사의 생가지도 마찬가지다.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의 만해 한용운 선사 생가지에도 생가 등이 잘 정비돼 있으며, 만해사, 공약삼장비, 민족시비공원과 만해문학체험관 등이 잘 조성돼 있다. 만해와 백야를 배출한 고장답게 홍성에서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수백 명의 영웅들이 잠들어 있는 ‘홍주의사총’도 잘 정비돼 있다.

을사늑약에 저항해 전국 각지에서 의병활동이 일어났던 1905년, 이보다 앞선 1895년과 1896년 홍주에서는 제1차 홍주의병이 일어났다. 1906년에는 제2차 홍주의병이 일어나 홍주성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홍주성 전투는 단일 전투로는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으며, 전국적인 의병활동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치열했던 전투 탓에 의병 수백 명이 숨졌는데, 이들이 묻힌 곳이 바로 ‘홍주의사총’이다. 홍주의사총에 잠들어 있는, 홍주성을 지키다 순국한 의병의 유해가 발굴된 것은 1949년 봄 식목행사를 하면서 발견했다.

잘 알다시피 홍성의 옛 이름은 ‘홍주(洪州)’다. 고려시대인 1010년대부터 사용한 지명이지만 정확히 사용하기 시작한 년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일제가 홍주의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일제강점기인 1914년 ‘홍성(洪城)’으로 지명을 바꿨으나, 오늘날까지도 본래의 고유지명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전국 유일의 목사고을이다.

옛 목사고을인 홍주의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가인 백야 김좌진 장군과 만해 한용운 선사의 생가지는 잘 복원돼 있고, 사당까지 세워져 있어 해마다 성대하게 제향을 모실 수 있다. 생가와 사당은 세워졌지만 정작 이웃도시인 아산 현충사와 같이 묘소 참배를 희망하는 관람객들이 흔히 있을 수 있는데, 참배할 수 있는 묘지가 홍성이나 생가지에는 없다.

이런 연유로 홍성의 경우 백야 장군이나 만해 선사의 묘소 참배를 원하는 관람객이 있다면 실망스런 답변만 남기게 된다. 두 분의 묘소가 생가지인 고향에는 없기 때문에 어찌보면 중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홍성군민들이 옛 선열들을 잘 모시지 못한 결과라 생각한다. ‘생가만 있을 뿐 묘소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거나, 이러한 사실이 알려진다면 홍성사람들은 원초적인 도리를 못하고 있다는, 모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창피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야 김좌진 장군과 만해 한용운 선사와 관련된 모든 선양사업에 우선해 ‘두 분을 환향(還鄕) 시켜드려야 한다’는 당위성을 제언하는 바이다.

백야 김좌진 장군의 묘소는 이웃 도시인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산 51에 있으며, 만해 한용운 선사의 묘소는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 84-2 망우산 공원묘지에 안장돼 있다.

백야 김좌진 장군과 만해 한용운 선사의 묘소를 고향인 홍성으로 반드시 ‘환향(還鄕)’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따르는 일이다. 홍성군은 생가지 복원 이후에 과연 무엇을 했는가도 반성할 일이다. 허허벌판이었던 생가지를 복원·준공하면서 백야 장군과 만해 선사의 유가족과도 상의됐고, 묘소가 있는 시장·군수와도 협의했던 묘소 이장문제는 그냥 세월만 흘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루 빨리 두 분 묘소의 이장을 통해 성역화를 완성해야 할 일이다. 이 일의 실천이야말로 후손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길이다. 그렇게 돼야만 홍주의사총을 비롯해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지, 만해 한용운 선사 생가지 성역화사업이 제대로 완성되는 길이며, 올곧은 홍주의 맥과 정신을 되찾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루 빨리 ‘백야 김좌진 장군과 만해 한용운 선사의 묘소’가 ‘환향(還鄕)’하기를 고대하고, 꼭 실현되기를 희망한다.
 

만해 한용운 선생과 부인 유씨(우측 분)  묘소.<br>
만해 한용운 선생과 부인 유씨(우측 분)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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