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送舊迎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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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送舊迎新)
  • 범상스님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12.28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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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극필반(物極必反), 밤은 극(極)에 달해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고, 낮이 점점 길어지는 동지부터 봄이 시작되는 입춘까지는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송구영신의 시간’이다. 묵은해를 보낸다는 것은 그동안의 일들을 되돌아보며 부족한 점을 살피는데 있고, 새해를 맞는 것은 날마다 새롭고 또 새로워지겠다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의 다짐으로서 희망이 아닐까 생각한다.

매일매일 새로워지는 일신우일신의 실천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철석같은 각오를 수없이 다져보지만 대부분 며칠 못가서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 어려움의 정도를 수치로 나타내면 열에 한사람이 성공하기 힘들다고 본다. 왜냐하면 현대인 대부분이 금연, 금주, 운동, 살 빼기 등을 입에 달고 산다. 특히 새해가 되면 가족들과 주변인들에게 멋진 계획을 약속하지만 정작 성공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뿐만 아니라 장년층에는 비만,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등 식생활을 원인으로 하는 식원병이 없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가 됐다. 누구나 심각한 줄 알면서도 잘못된 식습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음의 방증이다. 

이렇다 보니 음식과 생활습관이 약보다 우선돼야 하고, 성실하게 노력하는 것이 성공된 삶의 비결이며, 복권당첨확률이 하늘에 별 따기라는 뻔한 사실마저 외면당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숱한 핑계를 대어가며 건강은 약과 병원에 맡기고, 이루고자 하는 일들은 초자연의 힘이 있다고 주장하는 주술에 의지하거나, 요행수에 매달리기를 반복한다. 붓다께서는 이러한 일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세계를 사바라 하고 반복하는 사람을 중생이라 한다. 오죽했으면 수행자들이 모여 사는 사찰에서도 예불시간을 지키는 게 여간 어렵다 하겠는가. 

작심삼일이 됐던 용두사미가 됐던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일신우일신의 삶을 포기할 수는 없다. 콩나물은 물이 모두 밑으로 빠지는 시루에서도 쑥쑥 자란다. 이처럼 끊임없이 시도하고 노력해야 한다. 자칫 못난 자랑일 수 있으나 필자의 예를 들어 볼까 한다. 합장·절·걸음걸이 등 일상은 30여 년 전 행자교육원에서 배운 대로 흐트러지지 않도록 노력한다. 100kg을 넘나드는 타고난 덩치 덕분인지 음식에 있어 몸이 아파도, 남들이 맛없다고 해도, 잠자다 금방 일어났어도, 배가 불러도 여전히 맛있고 입맛은 당긴다. 그럴 때면 아주 오래전 살 빼기의 계기가 됐던 시장 좌판에 배 갈라 뒤집어 놓은 기름 노랗게 낀 통닭을 상기한다. 내 뱃속도 저렇게 기름이 차 있겠지 상상하면 음식을 절제하기 쉽다. 대중들과 공개적 약속으로는 매일 한 개 이상의 글을 써서 SNS에 올려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것이다. 현재 5년에 접어들었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78번째 글을 올렸다. 내용은 신통치 않지만 10년 동안 매년 1권씩 책을 써야겠다는 약속은 지키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나름의 원칙을 정해 놓으면 일신우일신은 어렵다 하더라도 작심삼일의 포기는 하지 않게 되는 것 같다.

일신우일신의 실천방법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반갑습니다’라는 인사말의 의미를 새기고 생활화할 것을 제안한다. 왜냐하면 ‘반갑습니다’는 절반의 가치를 뜻하는 ‘반값(半値)’이라는 명사에 ‘-습니다’라는 종결어미가 더해진 단어로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는 인사말이기 때문이다. 인간사는 우주에서 유일한 ‘나’와 대상이라는 전체의 관계 속에서 이뤄진다. 세상에 어떤 것도 유일의 홀로 존재할 수 없다. 혼자라는 말은(나 외에 무엇이 없다) 이미 대상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는 수많은 상대에 의해서 유지되며 값이 매겨지는 것으로 어떤 경우에도 반값 이상의 가치를 넘지 못한다. 아버지를 대하면 아들이 되고, 아들은 만나면 아버지가 되고, 부인을 만나면 남편이 되고, 상대에 따라 값과 역할이 달라지듯 세상 모든 것은 ‘불변의 고유 값’이 아니라 ‘변하는 상대 값’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반갑습니다’하고 인사를 나눌 때 “나의 반쪽을 만나서 더없이 기쁩니다”라는 의미를 반복해서 새긴다면 상대를 만날 때마다 일신우일신이 가능하다고 본다. 

인간은 숨을 쉬지 못하면 잠깐 사이에 죽는다. 그런데 공기보다 자신의 값이 크다고 착각한다. 중생은 이 같은 착각에 빠져 산다. 분명한 것은 나의 존재에 있어서 선후(先後)의 순서는 있을지언정 일체만물은 숨 쉬는 공기처럼 ‘상대 값’으로 소중하다는 것이다. 마주하는 상대, 더 나아가서 우주전체가 자신과 동일한 값을 가지며, 나와 전체는 온전히 분리될 수 없는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에 있음을 아는 사람을 부처라 한다.

그래서 ‘반갑습니다’는 좋고 싫음, 높고 낮음, 미(美)와 추(醜), 이익과 손해 그 어떤 것에도 자신의 몫이 반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기꺼이 받아들이고 기쁘게 맞이하겠다는 다짐으로서의 인사말이다. 이것 역시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왕에 하는 인사 ‘반갑습니다’라는 의미를 마음으로 깊이 새기며 상대를 ‘나와 동등한 값’으로 대해야 한다. 그것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존재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연루돼있고 개입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설령 억울한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러한 생각과 행동이 깊어지면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라는 속담처럼 어느덧 주변이 선(善)으로 맑아지고 좋아진다. 

갑진년 새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건네는 ‘반갑습니다’라는 인사로서 나와 당신은 서로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다르다고 할 수 없는 불일불이의 관계에 있음을 깨달아 일신우일신하는 행복한 하루하루 이어지길 빌어본다.

범상스님 <석불사 주지·칼럼·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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