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5년 10월 1일 좌익세력이 인민위원회를 결성해 일시 우세를 보이자, 우익도 곧 세력결집에 나섰다. 10월 7일 손재학, 원준성, 조영행, 송병진, 김봉룡, 이인상 등은 수덕사에서 회합, 우익단체를 결성하기로 합의한다. 당시 중앙에는 수백 개의 우익단체가 있어 어느 단체와 연결할지를 결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조직을 만들기도 합의하고 명칭은 잠정적으로 ‘사회민주주의동맹’으로 부르기로 했다. 10월 10일에는 조직위원회를 구성하고, 사무실은 적산가옥인 ‘남산장(南山莊)’이라는 여관을 사용하고, 군내에서 1800여 명의 조직원을 확보했다.
반면 인민위원회와 노동조합 사무실은 남산장 앞의 일본인 여관인 ‘비전옥’이었다. 이로써 홍성의 좌익과 우익은 팽팽한 세력을 이뤘다. 하지만 ‘사회민주주의동맹’은 인민위원회와 노동조합 사무실을 내쫓고 간판도 걸지 못하도록 했다. 이 같은 충돌로 이후 우익세력과 조익세력은 같은 길을 갈 수 없는 처지가 됐다. 홍성에서는 이미 1945년 10~11월경에는 좌우의 갈등과 대립이 본격화되면서 이후 세력 간 각축을 벌이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우익이 좌익을 압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는데, 바로 ‘신탁통치’문제였다. 우파는 12월 31일 모스코바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긴급회의를 열어 ‘반탁투쟁 홍성군위원회’ 결성과 1월 2일 홍성고등학교에서 ‘신탁통치반대 홍성군 궐기대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홍성의 우익세력은 반탁운동을 주도함으로 우위를 점하기 시작하면서 1946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을 주도하며 대중적 기반을 확고히 했다. 반탁운동을 통해 대중적 기반을 확보한 홍성지역의 우익세력은 1946년 7월 7일 서문감리교회에서 설립총회를 열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홍성군지부를 결성했고, 일련의 조직정비를 마치고 단독정부수립운동을 본격화했다. 독립촉성국민회 홍성군지부장은 손재학이 맡았다.
손재학(1901~1989)은 홍성읍 월계리에서 태어나 1920년대 기독교인으로서 홍성엡윗청년회에 참여했고, 1940년에는 홍성교회내 고아원 운영을 책임지는 총무를 맡기도 했다. 또 1920년대 유교부식회(儒敎扶植會)의 기관지 ‘인도(人道)’의 영업 책임을 맡기도 했다. 사상단체 무공회(無空會) 회원, 신간회 서무부 총무간사, 동아일보 기자 등 사회운동에 뛰어들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자치위원회 부위원장, 독촉국민회 지부장, 제헌 국회의원, 자유당 홍성군당 부위원장 등 우익 정치 활동을 전개한 인물로 홍성의 현대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손재학이 지부장을 맡은 독립촉성국민회 홍성군지부는 기독교계 인사를 비롯한 이승만 추종세력과 지역의 친일 자산가들로 구성됐다. 이들은 10월 항쟁을 계기로 경찰의 후원을 받아 면·리 단위까지 지부조직을 확대하는 한편 서북청년회, 대동청년단, 대한부인회 등의 우익단체들을 아우르면서 이승만의 반공·단독정부 노선을 지역 차원에서 관철시켜 나갔다.
■ 홍성사회 통합, 보도연맹사건 계기 무너져
미국이 한국 문제를 유엔(UN)에 상정해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실시되면서 이들 극우세력은 홍성지역의 지배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선거에 불참한 사회민주연맹, 국민당 계열의 중도우파세력은 뒤에 민주당 홍성군당 결성에 합류해 홍성지역 보수 야당의 흐름을 형성했다. 반면 사회주의 세력은 단독정부 수립과 6·25 한국전쟁의 과정을 거치며 완전히 배제됐다. 해방 이후 홍성지역의 국가건설운동은 좌우합작의 홍성군건국준비위원회, 사회주의계열의 인민위원회, 극우진영의 독립촉성국민회 홍성군지부로 그 주도권이 넘어가면서 전개됐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신간회 홍성지회, 가야동지회, 홍성군건국준비위원회로 이어진 좌우합작의 오랜 관행이었다. 이 관행은 찬탁과 반탁을 둘러싸고 좌우대립 구도가 정착한 이후에도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유지됐다. 이때 홍성지역의 중소지주 중심의 토지 소유구조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두터운 자작·소작농 층의 존재, 동족촌락 등 지연·혈연을 매개로 한 생활공동체로서의 지역적 통합성은 좌우합작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였다.

실제로 해방 이후 홍성지역의 정치적 대립은 민간차원의 좌우대립보다는 오히려 경찰과 좌익세력 사이의 대립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이후에도 기본적으로 유지되던 홍성지역사회의 통합성은 6·25 한국전쟁과 보도연맹사건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무너졌다. 특히 보도연맹사건은 좌우익 집안 간의 상호 보복 살상전을 수반하면서 지역의 민간사회를 두 쪽으로 분열시킨 요인으로 작용했다. 홍성지역의 민간영역을 놓고 볼 때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아직 분단이 고착화된 상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분단을 고착화 시키는 중앙차원의 이러저러한 징후들이 지역사회의 통합성에 의해 여과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었다.
홍성은 일제강점기부터 충청남도 중서부 지역의 정치·사회운동의 중심지였다. 중소지주가 많고 자·소작층이 발달해 다른 지역보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된 편이었다. 항일독립운동 과정에서도 중소지주들의 중도우파와 사회주의 계열이 서로 대립하기보다는 좌우합작을 우선했다. 해방이 되자 친일파를 제외한 좌우 두 세력이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홍성지부를 결성했으나, 미군이 남한이 진주함에 따라 극우세력이 힘을 얻었다. 하지만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면서 좌우가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 1945년 12월 무렵부터 좌익은 홍성인민위원회로, 우익은 국민당 홍성군당으로 갈라져 대립했다.
■ 홍성, 해방 직후부터 좌우익 대립·갈등 계속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홍성경찰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홍성지역 보도연맹원들을 잡아들여 홍성경찰서 상무관에 구금했다. 1950년 7월 11일 경찰은 후퇴하기 전, 군의 지휘에 따라 상무관에 구금된 보도연맹원들을 대전형무소로 이송하거나 홍성읍 월산리 백월산과 소향리 뒷산, 홍북 용봉산과 광천 오서산의 폐광(금광굴) 등에서 집단 사살했다. 홍성지역에서 보도연맹원 사살 사건 희생자 수는 100여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경찰이 후퇴한 바로 다음 날인 1950년 7월 12일 새벽에 인민군이 홍성에 입성했다. 곧바로 지방좌익 중심으로 인민위원회가 수립돼 홍성지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인민위원회는 먼저 토지개혁을 시행하고, 이른바 ‘민족반역자·반동분자’ 색출작업에 돌입했다. 대상자는 주로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협력한 인물이거나 좌익세력을 탄압하고 보도연맹원 사살에 협력했던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원과 지주·경찰·공무원 등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인민재판을 받았으나 즉결처분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 홍성지역에서 인민군과 지방좌익 등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은 인민군 후퇴 시기인 1950년 9월 27일경부터 홍성경찰서 경찰들이 복귀한 10월 7일 전 사이에 발생했다.
결과적으로 홍성은 해방 직후부터 좌우익 세력이 세력 확장을 위해 치열한 대립과 갈등을 계속했다. 하지만 승자는 미 군정과 경찰의 지원을 받은 우익세력이었는데, 한편으로는 우익세력은 좌익세력과 맞서면서 내부적인 분화와 권력투쟁을 계속했다. 분명한 것은 자치위원회나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적 기반은 일제 시기에 민족의 독립운동가이거나 말기의 가야동지회 사람들이 지역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홍성은 대체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이 강한 지역이면서도 반일적인 성향도 강한 지역이어서 항일독립운동 등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반면 사회주의계열의 사회운동은 상대적으로 활발하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지역이다.
항일독립운동의 성지(聖地)로 알려진 홍성(洪城)의 본래 지명은 홍주(洪州)다. 1905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홍주(洪州)는 그 어떤 지역보다도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했다. 지산 김복한, 최익현, 의병장 민종식에 만해 한용운 선사, 백야 김좌진 장군, 예산의 매헌 윤봉길 의사, 김한종 열사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생과 선비들, 우국지사들이 강력한 항일독립투쟁을 펼치자 일제는 아예 지명을 바꿔 버렸다. 일제는 의병과 독립운동가들의 항일투쟁 활동을 막을 속셈으로 공주(公州)와 발음이 겹쳐 헷갈린다는 이유로 홍주의 지명을 홍성으로 바꿨다지만 속셈은 항일독립운동의 기(氣)를 끊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중론이다. 전국의 목사고을 가운데 유일하게 고유지명을 되찾지 못한 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곳이다. 일제가 독립운동가들과 의병들의 항일정신을 막기 위해 땅의 이름까지 바꾼 아픈 역사가 숨어 있는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