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살림연구소장
칼럼·독자위원
혼란 속에서도 시간은 가듯, 예산 일정이 시작됐다. 지난달 25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2025년도 예산안 편성및 기금운용계획안 작성지침’이 의결 확정됐다. 각 부처는 이 지침을 가이드라인으로 삼아 내년도 ‘예산요구서’를 작성해 다음달 31일까지 기획재정부에 제출해야 한다.
‘2024~2028년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내년 총지출은 올해 667.4조 원보다 4.0% 늘어난 704.2조 원으로 사상 처음 700조 원을 돌파할 예정이다. 아무리 긴축을 하더라도 예산 증가 추세를 막을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경제가 조금이라도 성장하고 정부의 역할이 커지는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개인의 용돈을 다루듯 나라의 살림을 쉽게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만과 무지일 것이다.
이번 지침의 가장 큰 특징은 윤석열정부에서 빠짐없이 등장했던 ‘건정재정 기조’라는 표현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기재부는 ‘경기회복 마중물과 산업경쟁력 제고, 사회구조 개혁 지원 등에 재정의 적극적 역할이 요구된다’고 밝히고 있다.
정부가 변했을까? 사실 이러한 의견은 이미 국내외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된 요구였다. 이번 지침에서도 인용된 해외 기관들의 요구도 마찬가지이다. 국제기구와 신용평가사들이 고령화 등으로 인한 미래지출 압력에 대비한 지속적인 재정건전화 필요성을 강조했다면서 “고령화 등 미래지출 압력 대응을 위해 적극적인 건전재정 노력 필요(IMF ’25.2)”, “고령화 지출 등으로 정부부채가 지속 증가시 신용등급에 부담(피치, ’25.2)” 등을 인용했다.
그런데 이 기관들은 예전에는 신자유주의 기조 아래 작은 정부, 낮은 세금, 국가채무 축소를 요구하던 곳이었다. 그러다 코로나 이후, 이들 기관은 양극화 해소와 지속가능한 경제를 위해 입장을 바꿔 정부재정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국에 대한 지적은 일관됐다. 왜냐하면 코로나19 시기 한국의 재정 지출이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채무는 주요국가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매우 낮았다. 물론 가계부채와 기업부채는 풍선효과처럼 늘어나 최고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문재인정부에서의 기재부는 재정건전성을 주장하며 적극적 재정지출을 막았다. 그런데 윤석열정부는 전 정부와 반대로 재정 긴축을 추진했다. 문제는 재정긴축이 재정건전성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감세로 인해 재정건전성이 더욱 훼손됐다는 점이다. 재정은 지출만 줄인다고 건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수입이 더 많이 줄어들면 재정건전성은 훼손된다.
그런데 기재부는 전 정권 시절과 정반대로 이러한 상황에 반기를 들지 않았다. 결국 기재부가 내세운 재정건전성이라는 원칙은 그때그때 달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재부를 장악하지 못했던 문재인정부와 기재부를 지나치게 장악한 윤석열정부는 각각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해야할 일을 못 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것이다.
기재부 독재는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존재했다. 둘 다 피해야 할 현상이다. 다음 정부는 이러한 기재부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
정부의 입장 변화는 긍정적이다. 이외에도 의무지출 조정계획이라든가, 재량지출 구조 조정도 언급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연구소에서 분석보고서를 발행할 예정이며 이후에도 예산 과정을 모니터할 예정이다.
OECD에서는 재정에 대해 지속가능성, 투명성, 효과성을 원칙으로 삼는다고 한다. 이는 교과서적인 이야기지만 현실의 변화무쌍함 속에서 원칙을 가지고 접근해야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방향을 찾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 원칙을 지키는 재정, 지속 가능한 나라를 염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