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동면 월현리 주민
잠깐 대략 20년 전 즈음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어릴 적, TV에서 틀어주는 만화에서 나오는 주인공들은 비슷한 특성들을 지니고 있었다. 밝고 쾌활하고 에너지 넘치는 성격. 앞뒤 가리지 않고 지르고 보는 충동 가득한 성격. 여기에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치는 데다가 가끔씩은 장난기가 발동해서 사고까지 치는 인물. 사실 아이들이 보는 작품에서 나오는 이 주인공들은 사실, 히어로(영웅)라고 부르기에는 그 행동 방식이 조금 어긋났다. 그렇다고 무뢰한이나 악당이라고 하기에는 의협심이 강했다. 그렇다. 이들은 영웅, 즉 히어로라고 하기보다, 오히려 트릭스터(장난을 좋아하며 관습의 틀을 벗어나는 행동을 일삼는 인물)에 가까웠다. 재밌게도 이러한 주인공들의 특징은 당시 TV에서 틀어주던 국산 만화이건, 수입해서 방영해 주던 일본만화이건 똑같았다. 그리고 이 캐릭터들의 뿌리를, 10년이 지나서야 제대로 만나게 됐다.
손오공(孫悟空). 우리 때는 허영만 작가의 원작을 만화로 한 ‘날아라 슈퍼보드’에서 나오는 ‘미스터 손’,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에서 만든 ‘토리야마 아키라’ 작가의 ‘드래곤볼’의 손오공으로 훨씬 친숙하다. 근두운 대신 하늘을 나는 보드를 타고 다니며 삼절곤을 휘두르는 미스터 손. 초사이어인이 돼서 에네르기파를 쏘며 순간이동을 하는 손오공. 둘의 특성은 너무나도 다르지만, 그 뿌리는 바로 ‘서유기(西遊記)’라는 원전에 등장하는 손오공이었다. 그렇다면, 손오공의 어떤 모습이 지금까지도 수많은 만화 주인공의 모델이 되도록 만들어 준 것일까?
1500년, 명나라의 오승은(吳承恩) 작가가 엮어낸 걸작, 서유기.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삼장법사. 이 네 명이 천축국(지금의 인도)의 석가여래(釋迦如來)를 뵈어 경전을 받으러 간다는 이 이야기는 읽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이 그 명성을 알고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사실상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손오공이나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으로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작품의 시작인 1권이 손오공의 이야기로 꽉 차 있을 정도다. 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이 1권에서 나오는 이 요상한 원숭이 왕의 활약상에, 웃음을 짓거나 통쾌해하는 모습들을 보여줬다.
유불선(儒佛仙)이 통합된 세계관인 서유기의 세계에서, 손오공은 한낮 축생(畜生)이다. 물론 그 출생은 비범하지만, 손오공은 사람도 신도 아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손오공은 도술을 익히고서 그 능력을 뽐내기 시작한다. 손오공의 기가 막힌 비행(?)들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무기가 필요하다면서 근처 용왕이 사는 용궁에 들어가더니, 속된 말로 온갖 꼬장을 부리다가 여의봉(如意棒)을 가져가지를 않나, 자기를 데리러 온 저승사자를, 오히려 여의봉으로 후려쳐 빈대떡으로 만들더니 그대로 저승의 시왕(十王)들을 협박하지를 않나….
이러한 손오공의 비행은 당하는 입장에서는 분통 터지고 기막힐 노릇이었지만, 읽는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시원하고 통쾌하다. 이 부분이 나는 손오공이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라고 본다. 용왕이나 시왕들은, 옥황상제의 명령을 받고 일하는 신들이다. 그러한 신들이, 근본도 모를 원숭이에게 골탕을 먹고 협박까지 당한다. 이는 바로 오승은 작가가 살던 당시의 명나라의 황실과 관리들에 대한 풍자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가정제 치세였던 명나라는, 북로남왜(北虜南倭), 즉 북방에는 몽골이, 남방에는 왜구가 노략질을 일삼던 때였다. 그러나 가정제는 도교에 심취해서 통치는 간신들의 손에 넘어가고 조정에는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오승은 작가는 용왕, 시왕, 천궁의 신들이 손오공의 장난과 힘에 놀아나는 꼴들을 보여주며 당시의 부패하고 무능한 관리와 황실을 비판하고 풍자한 것이었다.
용왕과 시왕들을 협박한 뒤에도 손오공은 천궁으로 불려간다. 그 뒤에도 서왕모, 태상노군, 나타(이 신들은 중국 문화에서도 최고위급 신들로 받들어지는 신들이다) 등을 골탕 먹이며 날뛴다. 그러다가, 결국 화가 머리끝까지 난 옥황상제의 명령으로 손오공을 잡으라는 천라지망(天羅之網)이 펼쳐지고 서방의 석가여래가 나타나며 손오공은 제압된다. 그리고 500년 뒤, 손오공은 관세음보살의 권유로 삼장법사의 제자가 되어 천축행을 시작한다. 이것이 서유기의 서막 부분인 셈이다. 그러나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데, 수백 살을 넘게 먹은 손오공의 성격은 여전하다. 어딜 가나 높은 분들을 놀래키고 그 놀란 모습을 보며 깔깔대고 웃는다. 관습에 익숙한 이 높은 분들은, 손오공의 겉모습만 보고서는 우습게 보거나 인상을 찌푸린다. 그러나 손오공의 진면목과 능력을 보고 난 뒤에는, 손오공을 ‘보살님’이라고 부르며 머리를 조아린다. 물론, 불도(佛道)에 들어섰기에, 손오공은 이제 앞장서서 무고한 이들을 돕는 의협심도 보여준다.
민주 사회가 됐지만, 여전히 불필요한 권위가 묵은 때처럼 붙어 있는 우리 사회. 때로는 지나치게 겉치레를 중시하여, 미흡해 보이는 이들을 깔보며 섣불리 평가하는 우리 사회. 현실에도 서유기 속 천신들이나, 높으신 분들 같은 사람들이 적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이 현실 속 사람들도, 서유기에서 손오공을 깔보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을 보인다. 이 때문일까? 소설을 읽으면 이 높으신 분들이 손오공에게 골탕을 먹게 되는 모습은 여전히 통쾌함을 가져온다. 그렇기에 아직도 우리들은 손오공과, 그 손오공의 그림자가 붙어 있는 만화 주인공들을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 성격은 까다롭지만 불의를 그냥 넘기지 못하고, 권위 보기를 길거리에 돌멩이 보듯이 하는 이 유쾌한 트릭스터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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