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학살은 유독 유대인 집단거주 지역만 병에 잘 감염되지 않고, 죽는 사람도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던 것을 의심하다가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가 난무하자 발발하게 됐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적은 페스트 발병사례는 몸을 자주 씻어 청결을 유지하라는 율법을 따르다보니, 병에 대한 예방 역량이 다른 유럽인에 비해 컸던 결과였다. 또 전염병이나 나병 환자는 가족이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격리시킴으로써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사전에 방지했기 때문이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사회위기를 극복하는 수준이었을까? 메르스 극복을 위해 ‘위험소통’을 신속하게 전개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알리 바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질병관리본부장은 “위험소통이란 작은 정보라도 지역사회가 함께 공유해 불필요한 불안과 공포감을 낮추는 것이다. 위험에 대해 정확히 정의하고 쌍방향으로 전달해야 극복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의 질병관리본부는 메르스 양성 확진판정을 받은 첫 번째 환자가 나온 지난 5월 20일에서 열흘이 지난 같은 달 30일 “의도적으로 퍼뜨리는 유언비어에 대해 수사를 통해 바로 처벌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신속하고 정확하고 상세한 위험 소통 의지는 없고 처벌 의지만 강하게 천명한 것이다.
우리는 사전대비 없이 ‘아몰랑!(아 몰라 몰라!)’하다가 메르스에 ‘무방비 습격’을 당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12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처음 발생한 메르스를 그해 신종 감염병으로 지정하고 각국에 주의를 당부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3년간 메르스란 병명을 법정감염병으로 지정도 않고, 그 흔한 세미나를 열거나 연구보고서 하나도 내지도 않았다. 아예 메르스에 대한 연구를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할 대통령은 첫 확진판정 열이틀을 넘긴 지난 6월 1일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면서 “알아보고, 파악하고, 확인해야 한다”고 유체이탈식 대책지시를 했을 뿐이다. 이에 앞서 5월 26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은 ‘북한의 공포정치’에 대한 얘기만 있었을 뿐 메르스의 확산을 통제할 수 있는 언급은 하지 않았다. 이때는 평택의 병원에서 메르스에 감염된 환자가 서울 대형병원 등으로 옮겨 다니기 직전이었다. 병원감염을 막을 수 있었던 병원 이름 공개도 6월 7일에서야 뒤늦게 나왔다.
감염병이 휩쓴 자리에는 기존 질서와 지배구조, 권력자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치솟는다. 그동안 믿고 의지해왔던 권력과 제도들이 부질없고 거짓투성이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면서 정치, 사회적으로 낡은 것들을 새로운 것으로 바꿔야 한다는 사고의 전환이 일어난다. 위험소통이 부족하면 이렇게 사회위기가 찾아온다. 유엔개발계획(UNDP)은 외부 침입을 막는 안보개념을 확장해 ‘인간안보(Human Security)’란 새 개념을 제시한다. 빈곤, 차별, 억압, 기아, 환경 파괴, 정치적 자유, 기본권 보장, 경제적 불평등, 질병 통제 등 인간의 평화를 해치는 다양한 요소를 안보개념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